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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내가 앞장설게

2024. 09.

by 디미드

2019년 1월, 상하이를 거쳐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당시 다니던 회사는 연차를 모아서 한 번에 쓸 수 있었는데, 나는 이 여행을 위해 1년 동안 아침마다 쉬고 싶은 마음과 지친 몸을 억지로 끌고 출근하곤 했다. 매년 빈이 형과 현운이와 여행을 떠났지만, 이번에는 재희까지 합류해 4인조로 조금 먼 여행길에 올랐다. 인도양의 눈물이라 불리는 스리랑카에서 우리는 각자 가보고 싶은 곳을 정하고 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중 하나가 오늘, 우리 넷 말고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소설 같은 이야기의 장소인 나인 아치 브릿지다.


나인 아치 브릿지는 ‘하늘의 다리’라고도 불린다. 하루에 여섯 차례 기차가 지나가며,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엘라 마을의 랜드마크. 엘라 역에 내린 우리는 곧장 툭툭을 타고 나인 아치 브릿지로 향했다. 입구에서 내려준 것이 분명했지만, 내려가는 길을 몰라 한참 헤맸다. 가파른 절벽 사이 억지로 만들어 놓은 계단으로 겨우 내려오자,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길을 발견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한참을 웃었다.


“아마 나인 아치 브릿지를 보러 온 사람들 중에 이 길로 내려온 건 우리밖에 없을 거야.”


그렇게 사람들 속으로 걸어가며 풍경을 눈에 담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 넷은 단체 사진을 찍기로 했다. 촬영 담당이었던 나는 기찻길 위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었고, 그때 옆으로 강아지 두 마리가 지나갔다.


“얘들 좀 봐.”


빈이 형과 친구들이 강아지들을 쓰다듬었다. 관광객들에게 뭐라도 나올까 근처를 서성이는 녀석들이거니 하고 갈 때까지 기다렸지만, 결국 우리가 단체 사진을 다 찍을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름도 지어줬던 것 같은데 그것까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리랑카는 저녁 6시가 되면 불이 꺼진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은 채 강아지들과 함께 뛰어다니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해는 이미 지고, 주변에 많던 관광객들도 사라진 뒤였다. 내려왔던 길로 돌아가려 했지만, 빈이 형이 “기찻길을 따라가면 역이 나올 테니 그냥 걸어가자”라며 우리를 이끌었다. 강아지 두 마리도 우리를 따라 기찻길을 걷기 시작했다.


기찻길 양옆으로 울창한 숲이 이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꽤 무서운 곳이었다. 걸으면서 땅이 울리고 기차 소리가 들리면, 강아지들이 먼저 길에서 벗어나 알려주었다. 우리는 나무에 몸을 붙이며 기차를 피했고, 서로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처음 보는 낯선 풍경 속에서, 우리는 구글맵을 보며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40분은 걸어야 했다. 핸드폰 불빛을 켜고 강아지들을 따라 걷던 중, 갑자기 발소리가 들리더니 강아지들이 짖기 시작했다. 앞에서 두 명의 남자가 등불을 들고 나타났다.


“이쪽 숲으로 들어가면 내 툭툭이 있어. 500루피만 주면 엘라 역까지 데려다줄게.”


지칠 대로 지친 몸과, 혼자 여자인 재희를 맨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빈이 형에게 말했다.


“형, 툭툭 타자.”


빈이형은 잠시 고민하다가, 낯선 남자들에게 거절 의사를 전했다.


“여기는 많이 위험한 곳이야. 400루피는 어때?"


목소리를 높여가며 자신들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자는 사내들을 뒤로한 채 우리는 빈이 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밤에도 무더운 스리랑카 날씨 속에서, 점점 말이 없어졌다. 나는 맨 앞에서 걷던 형을 불러 세웠다.


“형! 이제 그만 걷자. 조금이라도 일찍 가서 쉬자고. 내가 저 사람들한테 가서 툭툭 탄다고 할게.”

“우리 많이 걸어왔잖아. 다 왔어.”

“지금 다 힘들고, 여행은 오늘만 있는 게 아니잖아.”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 괜찮아, 내가 앞장설게.”


형의 말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는지, 재희가 달려와 노래를 부르며 “걸으면서 가자”고 했다. 현운이는 가운데서 눈치를 보았다. 결국 나는 형의 말대로 더 걷기로 했다. 상황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대장이니까.


5분쯤 더 걸었을까, 다시 강아지들이 짖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남녀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왜 여기서 걷고 있어?”

“기찻길 따라 역으로 가는 중이에요.”

“그래. 조금만 더 가면 엘라 역이야.”

“알려줘서 고마워요.”

“가는 길에 툭툭 타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심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내가 등불을 든 사람들에게 뛰어가 우리가 툭툭을 탔다면, 모두에게 나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빈이 형을 바라봤다. 형은 빨리 역으로 가자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라 역 불빛이 보였고, 역 입구로 들어서자 강아지들은 우리를 다시 쳐다보더니 같이 걸어오던 나인 아치 브릿지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걷는 내내 농담처럼 말했던 “얘네가 우리 지켜주려고 따라온 거 아니야?”가 맞았나 보다.


겨우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강아지들과 나인 아치 브릿지에서 보낸 하루를 이야기하며 밤을 꼴딱 새웠다. 그리고 다음날 또 여행을 시작했다.


작년 겨울, 오랜만에 우리가 다시 모였을 때도 스리랑카 이야기 어김없이 나왔다.


“형, 솔직히 그때 무서웠지?”

“당연하지! 나 엄청 쫄았는데 아닌척했어. 내가 겁내면 너네는 누가 지키냐.”

“그치? 겁쟁이잖아 형. 미안, 돌아보니 내가 눈앞의 힘든 것만 생각했나 봐.”

“아니야. 나는 너희보다 나이가 조금 더 있는 형이니까, 그때 내가 짊어진 걸 알고 있었던 거야. 운이 좋았던 거지. 재희가 앞에서 노래하며 걸어주니까 덜 무서웠고.”

“재희가 다 했네. 그 강아지들은 잘 지내려나?”


"스리랑카의 그날 밤처럼 우리는 밤새 떠들었다."


2019년 1월 스리랑카 나인 아치 브릿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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