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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마음이 그래

2024. 10.

by 디미드

2016년 겨울, 나는 신촌에 살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문제로 안팎이 모두 시끄러웠던 해. 나에게는 지독하게 아팠던 해이기도 했다.


매일 새벽, 사람들이 가득 찬 버스를 타고 상암으로 출근할 때면, 나는 아직 학교에 있는 친구들과, 그 당시 오래 만나고 있던 그녀를 떠올리며, 익숙하지 않은 서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16년도 방송국 생활은 새로운 사건과 사람들로 늘 시끄러웠고, 긴장의 연속이었다. 실수하고 깨지고 혼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몇 년 뒤의 내 모습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나고 있던 그녀와 남들 다 하는 나이에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평범하게 사는 것. 그게 전부였다. 물론 지금은 내 생활과 생각들이 많이 변했지만, 그때는 그랬다.


상암에서 버스를 타고 세브란스병원 정류장에 내린 뒤, 신촌 젊음의 거리를 지나 4번 출구 근처 집으로 걸어가던 퇴근길. 젊음의 거리 곳곳에는 인공눈 축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며 겪은 일, 인공눈 축제 이야기, 직장 상사 뒷담화 등. 내 이야기에 같이 화내주고, 내 웃음에 행복해하던 그녀가 그날은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눈치 없던 나는, 그날 그녀가 보내는 마지막 신호조차 놓치고 말았다.


“오빠… 우리 헤어지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대답은 같았다. 한 시간 동안 울고불고 매달려도, 돌아선 마음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상황 때문일까? 나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었을까? 통화하던 손이 퉁퉁 부을 만큼 매섭던 겨울, 신촌역 4번 출구 앞. 대학교에서 처음 만나 3년을 사랑했던 그녀와 그렇게 나는 이별했다.


사실 헤어진 다음 날의 기억은 없다. 어떻게 출근했고, 무슨 일을 했는지, 누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 말로 하면, 세상이 억까한다는 느낌이랄까. 퇴근하자마자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뭐 하냐고?” 이별한 남자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뻔한 스토리.


한걸음에 안양에서 신촌까지 달려와 준 건이. 겨울이 지나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간다고 몇 달 전부터 말해왔던 친구다. 헤어진 그녀와 나, 그리고 건이 커플은 자주 만났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보다 먼저 이별의 아픔을 겪은 건이가 하는 말이 다 진심처럼 느껴졌던 날이었다.


“야, 너네는 안 헤어질 줄 알았어.”

“이유를 모르겠다 나도. 그냥 헤어지자는데 잡을 방법이 없더라.”

“그걸 모르는 게 이유일 수도 있어.”

“나 진짜 한심한 놈이네…”


오가는 대화 속에서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는 뻔한 위로는 없었다. 대신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소주에 태워 서로 건네주기를 반복했다. 취기가 올라오자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이야기를 돌렸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어디서 나온 생각이야?”

“강의를 듣다가 강사님이 하는 말을 듣고 용기를 얻었지.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딱히 내 미래 계획도 없었고.”

“그거 가는 데 비싸냐?”

“워킹홀리데이가 뭔지는 알고 물어보는 거야?”

“모르지. 그냥 내 마음이 그래.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누우면 자꾸 걔가 생각나. 한국이 아니면 조금 다를까 하고.”

“PD 되겠다고 방송국 들어가서 개고생하고 있는 놈이, 겨우 이별했다고 그걸 때려친다고?”

“어, 나 지금 진심인데. 그리고 ‘겨우’라니, 인마.”

“너 나중에 지금 동기들이 PD 되고, 프로그램 하나 맡고 있으면 땅을 치며 후회할걸.”

“너는 후회하려고 호주에 가기로 했냐? 누가 보면 지는 안 가는 줄 알겠네.”


다음 날 아침, 자취방의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며 결국 결심했다. 이대로 시간에 맡겨 그녀에 대한 마음도 지나가길 바라기만 할 수 없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사직서를 냈다. 사직서를 내면 곧바로 멋있게 회사를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던, 그 시절의 나. 파렴치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 인수인계를 마치느라 한 달은 더 꼬박 출근해야 했다. 호주로 가야 한다는 말만 뱉었을 뿐, 두 달 남짓 준비한 것은 급하게 끊은 시드니행 비행기표, 워킹홀리데이 비자, 월세, 그리고 남은 보증금 300만 원이 전부였다.


“다녀올게.”

“그래 몸조심하고, 돈 필요하면 연락하거라. 상건이도 아프지 말고.”

“어머니 얘는 걱정마세요. 도착하면 제가 연락드릴게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회사를 그만두고, 일주일 뒤 호주로 가서 1년 동안 살고 오겠다는 철없는 아들에게도 어머니는 끝까지 잔소리 한번 없었다. 집을 나서며 건이와 나는 각자 금전적 지원을 절대 받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호주에서의 1년이 앞으로 우리의 인생에 어떻게 부메랑처럼 돌아올지는 그때 전혀 알지 못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온 나라가 정신이 없던 그 주, 건이와 함께 시드니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질 않는다. 확실한 건, 나는 비겁하게 세상에서 도망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애써 온갖 변명으로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려 했다.


뭔가 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아주 낭만적인 기분과 마음은 호주에 도착해 채 3일도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를 두 달간 조금이나마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었다.


호주에서 내가 보고 느낀 세상과 경험들은 지금의 나에게 아주 큰 자양분이 되었지만, 만약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사직서를 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세상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문득 해보곤 한다.


"물론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해 마음으로 안부를 묻기도 하면서."


2017년 3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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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