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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웃음꽃

2025. 01.

by 디미드

대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새내기 시절 보았던 영상과 어느 선배님이 되어가고 있던 나는 취업 걱정과 세상으로 나갈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우리 학과에서는 졸업을 위해 팀을 짜 단편영화를 만들거나 개인 논문을 써야 했는데, 3학년이 끝날 무렵이면 이미 많은 친구들이 영화 제작에 지쳐 논문을 택하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함께 달려온 친구들과 마지막 단편영화를 남기고 싶었다. 시놉시스 두 줄만 달랑 써놓은 채, 뻔뻔하게 후배들을 찾아다니며 술을 사주고 감정에 호소하며 설득했다. 다행히 “형 믿고 같이 하겠다”라는 후배들의 말에 마음이 단단해졌다. 그들에게 이 시간이 언젠가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며, 종강 후 홀로 학교에 남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학교는 역에서 차를 타고 시골길을 한참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차가 없던 나는 자취방에 틀어박혀 노트북과 씨름하며 날을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창작의 고통’과 보일러가 고장 난 방의 추위뿐, 그마저 익숙해지니 더 막막했다. 제목조차 없는 글들을 붙들고 끙끙대던 어느 날, 침대에 누워 친구들의 페이스북을 훑다가 우연히 라디오 사연 하나를 읽게 되었다. “그래, 글은 이렇게 써야지.” 하고 감탄하던 순간, 문득 머릿속에 느낌표가 번쩍였다. 이 사연이 영화가 된다면 어떨까. 곧바로 조연출을 맡아주기로 했던 재욱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재욱아. 나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좋은 생각 말고, 시나리오는 어떻게 되고 있는데?”

“방금 읽은 라디오 사연 글인데 내가 각색해서 우리가 쓰면 어떨까 하고.”

“뭐가 좋다는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저작권 뭐 이런 거 상관없나?”

“상업영화도 아니고, 그냥 졸업 작품인데 문제없지 않을까? 일단 확인해 볼게.”

“야, 내가 알아볼 테니까 넌 일단 시나리오나 먼저 써. 시간 없어.”


어느 중년 부부의 사연 속 주인공에게 ‘철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초고는 놀랄 만큼 술술 써졌다. 나의 경험도 에피소드처럼 녹여내고, 누구나 공감할 평범한 일상도 틈틈이 담았다.


초고를 두세 번 더 고친 뒤, 재욱이와 함께 교수님께 가져갔다. 학생들의 시나리오를 꼼꼼히 뜯어고치기로 유명한 교수님이라 긴장이 잔뜩 되었지만, 의외로 몇 가지 아이디어만 던져주시고는 “빨리 촬영을 시작해라”라며 말씀을 하셨다.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서둘러 배우를 찾기 시작했다.


시놉시스와 주인공의 이미지를 글로 최대한 표현해 배우 모집 사이트에 올렸다. 곧 ‘지원합니다(철민)’, ‘지원합니다(아내)’라는 제목의 메일이 동시에 도착했다. 프로필 사진 속 두 사람은 내가 그리던 이미지와 거의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 보면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일단 만나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철민 역에 지원한 배우님은 안산에서 극단 활동을 하고 계셨고, 아내 역 배우분도 안산 근처에 사신다고 했다. 우리는 서둘러 짐을 챙겨 안산으로 향했다.


"프로필 보니까 우리 출연료로는 턱도 없겠어."

"일단 만나서 얘기라도 해보자“


약속 장소에 도착한 우리는 초조하게 남자 배우분을 기다렸다. 아내 역의 배우님께 30분 뒤에 보자고 연락하려던 찰나, 지원서에서 보던 두 분이 같이 들어왔다. 어리둥절한 우리에게 두 분은 웃으며 말했다.


“저희 부부예요. 실제로요. 그리고 같은 극단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순간, 놀라움에 말문이 막혔다. 전체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싶다는 그들에게, 나는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메모해 놓은 글로 가득한 지저분한 시나리오를 조심스레 건넸다. 두 분은 한참 말없이 시나리오를 읽으시더니, 이 역할을 꼭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출연료 이야기는 하지도 못한 채 우리는 터미널로 돌아갔고, 천안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타서야 조심스레 남자 배우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저희가 생각한 돈은 5일 차 촬영에 00만 원이에요. 두 분 경력에 비하면 터무니없죠. 안 하신다고 해도 할 말이 없어요. 괜찮습니다.”

“아 그렇군요. 아내와 얘기하고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우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봅시다.”라는 문자가 왔다. 촬영이 끝나고 뒤풀이에서 알게 된 사실은 안산까지 찾아와 이야기하는 나와 재욱이의 모습이 지난 시절 그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다고.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고 있다고 말이다. 우여곡절 많았던 준비 과정을 끝내고, 그렇게 우리는 2016년 7월, 땡볕 아래 힘을 모아 촬영을 시작했다.


무더위 속에서 일주일 동안 밤샘 촬영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못 하겠다며 뛰쳐나가기도 했고, 의견 충돌로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촬영은 끝났다. 마지막 날, 배우분들이 손을 잡으며 “다시 볼 날이 있길 바란다”고 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편집이 끝나면 꼭 연락드리겠다고 말하고 헤어졌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여태 다시 만나 뵙지는 못했다. 가끔 소식을 듣거나 몰래 찾아보는 정도. 언젠가 직접 만나 감사한 마음을 두 분께 꼭 전하고 싶다.


편집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원하던 방송국에 취업했고, 작품에 온전히 매달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 핑계 같지만, 끝까지 작품을 책임지지 못한 연출로 남아버렸다. 완벽한 배우들과 미숙한 연출, 그리고 멋진 친구들이 함께한 작품. 단순히 추억으로만 묻어두기엔 너무 아깝고, 후회와 아쉬움으로만 담아둘 수 없어 이렇게 글로 남기고 있다.


대학 시절 원하던 일들을 지금쯤 하고 있을 그 친구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언젠가 모이자는 그 말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만든 영화 제목처럼, 누군가의 웃음꽃이 되어 다들 어느 곳에서든, 무슨 일을 하든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끔 생각나는 그 여름날이 그리워서 써보는 글."


4. 당신의 웃음꽃.jpg 2016년 7월 촬영장 어딘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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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