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6.
‘그린룸(Green room)’은 극장의 분장실을 지칭하는 단어.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것으로 잘 알려진 옅은 초록색으로 벽이 칠해져 있는 데서 유래했고, 배우가 무대에 서기 전 마지막 준비를 하는 곳이자 공연을 마치고 세상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는 곳이다. 무대예술전문인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이 단어를 어딘가에 메모해놨다가 이제야 쓰는 글.
나의 그린룸은 항상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자주 가던 지인의 카페가 그린룸이 되기도 했고, 녹음실이 되기도, 진짜 아이러니하게도 회사가 그린룸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나만의 그린룸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여러 이유로 자주 찾는 곳이 있다.
내 나이 20살, 9월. 멋진 영상학도를 꿈꾸던 나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참관한다는 이유로 대학교 선배와 동기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동기들은 본가와 가깝다는 이유로 나에게 부산 가이드를 맡겼고, 나는 부랴부랴 며칠 전부터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해운대부터 동백섬, 태종대까지. 그중에서도 우리 눈에 들어온 곳은 광안리 해수욕장과 멀지 않은 민락수변공원이었다. 지금은 금주 구역으로 바뀐 걸로 아는데, 그때만 해도 부산에 오는 사람들은 밤이면 다 이곳에 모인다고 할 정도로 자리가 없을 만큼 붐볐던 곳이다.
부산에 도착한 우리는 영화도 보고,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다 택시를 타고 수변공원에 도착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그곳은 우리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거침없던 20살의 우리는 이곳저곳에 말을 걸며 합석을 시도했지만, 남은 건 우리가 사 온 마른안주와 소주 두 병뿐이었다. 먼저 만취한 친구들을 숙소로 하나둘 돌려보낸 뒤에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내가 좋아하던 같은 과 동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나 지금 수변공원인데 넌 어디야?"
"나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 지금 00이랑 둘이 걷고 있는데 너도 올래?"
"아, 여기 정리하고 애들 다 보내면 30분 정도 걸릴 것 같아. 도착해서 연락할게."
수변공원 끝에서 광안리 해수욕장까지 걸어가며 느꼈던 설렘. 짝사랑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의 광안리는 내 인생 최고의 바다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걸어가는 내내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 냄새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 여자 동기와 나는 더 발전하지 못했다. 내가 군대에 가자마자 그 친구가 복학생 선배와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슬픈 결말로 끝난 이야기. 그래서인지 광안리는 내 머릿속에 제대로 각인이 되었다.
23살, 군대를 전역하고 부산국제영화제 때문에 다시 오게 된 광안리. 하나도 다를 게 없었던 광안리지만 겨우 3년 만에 많이 달라진 내 모습과 주변 상황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옆에 있는 사람도, 내가 보는 세상도. 그렇게 지금도 광안리는 과거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기 가장 쉬운 곳이 되었다. 취업을 앞둔 시점에도,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다른 사랑이 시작될 때도, 이별의 아픔이 있을 때도 항상 광안리를 찾았다. 아 물론, 나쁜 추억만 있는 건 아니다.
지금도 광안리 어딘가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으면 쉽게 일어나기 어렵다. 눈은 바다를 보고 있지만 머릿속은 온통 지난날들의 기억에 빠져 열심히 헤엄치고 있기 때문이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 년에 한 번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꼭 와야 하는 광안리는 그렇게 내 그린룸 중 하나가 되었다.
매년 오다 보니 광안리 해수욕장 앞에 카페의 사장님이 알아봐 주시기도 하고, 광안리 앞에서 찍은 사진들이 계속 업데이트 되어가는 즐거움도 있다. 이제는 책 하나 들고 하루 종일 앉아 있거나 하는 것은 조금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그냥 좋다. 광안리 어딘가에서 내가 생각의 헤엄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다음으로 나아갈 준비가 다 되었다는 뜻이니까. 겨울이 오기 전에 또 한 번 가야겠다.
"당신의 그린룸(Green room)은 어디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