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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라는 차를 타고

2025. 04.

by 디미드

며칠 동안 낭만이라는 단어에 대해 길게 풀어쓴 책을 읽는 와중에 청첩장 하나를 받았다. 7년 전 어느 날, 멜버른의 그레이트 오션로드 위를 달리던 차 안 가득했던 낭만을 떠올리게 하는 소식.


방송국을 때려치우고 무작정 떠났던 호주에서, 내가 처음 한 일은 집을 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영어학원 등록이었다. 집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지만, 야간반이 있는 영어학원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며칠간 고민하다 결국 한국에서 딱 한 번 만났던 유학 전문 강사님의 소개 덕분에, 시드니 시티홀 근처 학원을 등록할 수 있었다.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극장과 카지노, 호텔 등을 돌며 오후 5시까지 청소를 하고, 퇴근 후 바로 영어학원으로 향한 지 3주째였다. 야간반은 남미와 유럽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 한국인은 나와 함께 온 친구 건이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날, 한국인처럼 생긴 낯선 얼굴 하나가 눈에 띄었다. 군대를 갓 전역한, 조금 앳돼 보이던 24살의 욱이를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호주에 온 욱이는 낮에는 공부와 영어학원을, 밤에는 일을 하던 전형적인 한국인 워홀러였다. 다른 곳으로 일을 옮기면서 야간반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사람을 대하는데 수줍음이 남아 있던 그에게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갔던 나. 수업이 끝난 뒤 집으로 가는 길, 당시 한국 돈 5천 원 남짓하던 도미노 피자를 같이 먹자고 꼬셨더니, 멍하니 듯 기다리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드니 피어몬트 어딘가의 도미노 피자 가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10년 가까이 이어진 욱이와의 인연이 시작된 날이라 그런지, 내 기억 속 한 장면으로 깊게 남아 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우리는 매일같이 만났다. 일이 없는 날은 시드니를 돌아다니다 학원에 지각하기도 하고, 서로의 집에 사는 외국인 친구들을 모아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다. 벌벌 떨던 욱이를 억지로 끌고 가 2만 피트 하늘에서 뛰어내린 스카이다이빙도 있었다. 오전반을 다녔던 욱이 덕분에 나는 호주에서 더 많은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6개월 남짓 살았던 시드니에서 꽤나 멋진 추억들을 남길 수 있었다. 앞으로 살면서 이런 일상을 다시 누릴 수 있는 시기가 올까 싶기도 하다.


영어학원의 교육과정이 끝나갈 즈음, 나는 시드니에 계속 있을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시드니에서 일만 하다 1년이 지나갈 것 같다는 느낌에, 나는 욱이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욱아, 형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까 봐.”

“어? 왜요?”

“워킹홀리데이를 왔는데 워킹만 하고 있으니, 한국이랑 다를 바가 없네. 다시 돌아가서 경력이라도 쌓아놔야지.”

“에이, 그러지 말고 형 저랑 농장 갈래요?”

“갑자기 농장은 왜?”

“어차피 한국이나 호주나 일할 거면 돈이라도 많이 받는 농장이 낫지 않을까요? 모아서 한국에 돌아가도 되고.”

“얼마나 많이 벌길래?”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허점이 많은 욱이가 가끔 이상하게 정곡을 찌르며 말할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욱이는 여러 이유로 갈팡질팡하던 내 마음속 고민을 시원하게 풀어줬다. 결국 우리는 아는 지인의 지인을 통해 번다버그라는 동네의 농장과 연결되었다.


"욱아, 한국에 돌아가면 뭘 하고 싶어?”

“일단 뭐가 됐든 취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직은 고민 중이에요."

"나는 음악 관련 일을 언젠가 하고 싶어. 그냥 꿈같은 얘기지만."

"형, 약한 소리 하는 건 또 처음 보네요. 할 수 있어요!"

“아이 그럼! 일단 우리 농장에서 살아남아 보자.”


번다버그 공항에 도착해 처음 보는 사람의 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시작된 6개월간의 농장 생활. 딸기, 만다린, 고구마, 블루베리 등 돈이 되는 작물은 가리지 않고, 새벽부터 싸온 도시락을 먹으며 흙바닥에서 일했다. 힘들어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냈고, 묵던 백패커의 매니저가 되기도 했으며, 경쟁이 치열한 블루베리 농장에서는 어렵게 취직해 탑픽커로 인정받기도 했다. 지금은 번다버그에서 벌었던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보다 값진 경험을 준 시간과 장소로 기억하고 있다.


그해 12월, 한국에서 원래 하던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해달라는 오퍼가 들어왔다.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기에, 나는 욱이보다 세 달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호주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멜버른에서 욱이와 짧은 여행을 한 뒤 시드니로 돌아왔다. 호주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형,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른 것 같죠?”

“그러게, 1년이 참 꿈같다.”

“저, 한국에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응원해 주세요.”

“그래그래. 제발 이번에는 다른 길로 새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고 보세요! 아, 그리고 형한테 고마운 게 참 많은데…”

“나머지는 한국에서 만나 천천히 이야기하자.”


공항까지 배웅해 주던 욱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10시간 비행 동안,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추억들을 애써 뒤로하고 덤덤해지려 애썼다. 남은 삼 개월을 욱이가 무사히 보내길 바라며, 또 욱이에게 더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번다버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눴던 말처럼 나는 음악과 관련된 일을 시작했고, 욱이는 부산의 철도 기관사가 되었다. 세상 참 모를 일이다. 지금 돌아보면, 정말 낭만 가득했던 20대 중반을 함께 보낸 우리가 벌써 30대 중반이 되었다. 욱이가 보내온 청첩장을 받고, 결혼식장으로 가는 지금까지 이 글을 쓰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호주에서의 그리움과 아련함 사이를 계속 그리느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처럼, 욱이도 그 낭만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길 바라며, 우리는 지금 아주 행복한 것 같고, 앞으로 더 행복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욱아, 결혼 축하한다.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2017년 11월 브리즈번 어느 길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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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