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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종착역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정거장

2025. 02.

by 디미드

마음이 싱숭생숭한 휴일, 할 건 많은데 하기 싫은 그런 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를 남의 얘기 몰래 듣는 것처럼 작게 틀어놓고 쌓인 일들을 하나씩 처리하고 있었다. 점점 고조되는 영화의 전개에 양손 가득할 일들을 내팽개치고 TV 앞으로 돌아오길 몇 번 반복하다 결국 맥주 한 캔 들고 앉아 영화의 엔딩까지 시청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일은 자주 있다.


벌써 10번도 넘게 본 것 같은 영화 '봄날은 간다'는 항상 엔딩 즈음에 기분이 이상해진다. 말로 표현해 보려 해도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고 글로 써보려 해도 또렷하게 써지지 않는 그런 감정들이 남게 되는 참 이상한 영화.


대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네이버 '영화 한 줄 평’을 찾아볼 일이 거의 없었다. ‘봄날은 간다’를 다시 보고, 내가 좋아하는 장면의 로케이션이 궁금해 찾아보다 발견한 누군가의 한 줄 평을 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별을 처음 겪는 남자의 이야기가 영화의 설정이 아닐 텐데 남자 주인공 상우의 이별은 마치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첫 이별을 떠올리게 한다.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끝나버린, 아니면 시간의 익숙함에 속아 한쪽이 끈을 놓아버린 그런 서툰 이별 같은 거.


대학교 1학년, 전공 수업의 과제를 하던 중 처음 만나게 된 영화 ‘봄날은 간다’는 발표 자료를 만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봐야 했던 흔한 사랑 영화 중 하나였다. 같이 보던 동기들과 영화 분석보다 TV에 자주 나왔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명대사와 은수 역의 이영애 님의 외모에 감탄만 연발했던 기억이 전부였다.


대학교도 졸업하고, 몇 번의 사랑과 이별을 겪고 난 뒤에 신촌역 근처 자취방에서 이 영화를 혼자 다시 보게 되었다. 채널을 돌리다 마주한 영화의 초반, 은수에게 푹 빠진 상우에게서 지난 몇 년 동안의 내 모습들이 겹쳐 보였다. 영화처럼 지난 사랑의 순간이 아름답거나 조용하진 않았지만, 순수했고 감정이 앞섰던 서툰 연애. 솔직하고 현실적이었던 은수를 닮은 그녀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이 정말 쉽지 않았던 나이였다. 애꿎은 현실만 탓하며 보는 내내 마음이 찜찜했고, 그렇게 두 번째로 ‘봄날은 간다’의 엔딩을 마주했다.


호주에서 1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뜻밖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또 몇 년이 흘렀다. 천안에서 겨우 내 자리를 찾아갈 즈음,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아는 사람이 천안에서 모임을 만들고 싶어한데.”

“어떤 모임인데?”

“나도 자세히 들은 건 아닌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모집하나 봐.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그냥 번호 줬어.”

“야… 나한테 먼저 물어보고 번호를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 몰라. 너 진짜 좋아할 거라니까? 그 모임장이 내가 예전에 서울에서 같이 모임 하던 친구거든. 한번 가봐.”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임에 초대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첫 번째 모임에서 서로 ‘영화 속 주인공이 나라면?’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뭔가 하나가 빠져있는 문자 속 내용에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방금 문자를 받은 박하림이라고 합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혹시 영화가 정해져 있나요? 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영화나…”

“아! 제가 그걸 빠트렸나 봐요. 다시 문자 보내드릴게요.”

“아닙니다. 모임 날 뵐게요. 감사합니다.”


[우리의 첫 번째 모임! 영화 ‘봄날은 간다’의 영화의 상우, 은수가 되어 사랑과 이별에 대해 조금 편하게 이야기해 봐요.]


희미해진 영화의 내용도 다시 돌아볼 겸 늦은 밤 소파에 앉아 주인공 상우가 될 준비를 마치고 세 번째로 ‘봄날은 간다’를 틀었다. 차라리 아는 영화라 잘 됐다며, 모임에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 나는 몇 년 전 상우와 내 모습이 겹쳐 보이던 그날의 감정이 아닌, 상우보다 그를 바라보는 여자 주인공 은수의 행동과 대사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 헤어지자”

“내가 잘할게”

“헤어져”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사랑은 변하지 않아. 단지 사람의 마음이 변했을 뿐이지…”


상우가 무작정 찾아간 은수의 집 앞, 그곳에서 이별을 맞이하는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세 번째 이 영화를 보고 있었던 나도, 변한 게 틀림이 없었다. ‘은우도 누군가에게는 상우 같았던 그런 시절이 있었을 거야. 상우에게 이별의 말을 하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겠지.’ 나는 은우에게서 달라진 나를 또 비춰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과 이별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기에, 지난 시간과 지금 마주한 영화가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조만간 있을 모임에서 상우가 아닌 은수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하기로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상우가 결국은 은수처럼 되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며칠 뒤 모임에서 나는 6명의 상우와 나를 포함한 4명의 은수를 만났다. 서로 머뭇거리던 소개 순서를 지나자, 각자 본인만의 시간과 아쉬움 사이에서 꺼내지 못한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 말들 속 아렸던 기억이 떠올라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표정으로 보이지 않는 공감과 위로를 서로 건네기도 했다.


‘봄날은 간다’의 주인공이 되었던 그날이 꽤 인상 깊었는지, 이후 몇 번 더 모임에 나갔다. 매번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지던 그 모임에서만큼은, 말하지 못했던 지난 감정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상우와 은수들은 지금 어디쯤 왔을까. 너무 힘들어 중간에서 쉬고 있진 않을까, 아니면 이미 종착역에 도착했을까. 연락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 궁금해지는 날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우리는 지금 종착역일까, 정거장일까."


2025년 6월 천안의 어느 한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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