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 플로리다 여행 못 간 한이 아직까지 남아.
할로윈과 추수감사절을 끝내고, 남편이 기말고사 준비에 한창일 11월 말, 우리는 뒤늦게 겨울방학 여행을 생각하게 되었다. 엘리의 DPNS 적응, 남편의 Bar 시험 결정, 나의 박사과정 진학 취소 등 너무 많은 일들이 하반기에 일어났다. 그래서 겨울방학에 여행 갈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이제라도 생각나서 다행이었다.
"여보, 이번 겨울에 플로리다 여행 어때?"
박사를 포기하고 헛헛한 마음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이럴 때면 쇼핑을 하던가, 맛있는 음식을 먹던가, 여행을 가면서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이번에는 캘리포니아 내륙에 위치한 데이비스의 습하고 추운 겨울을 피해 플로리다의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고 싶었다.
남편은 반색하며 대답했다.
"그래,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엘리도 디즈니월드 구경시켜 주고."
남편도 빡빡한 수업 스케줄과 밀려오는 과제들, 그리고 기말고사 준비 때문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플로리다에는 엘리가 즐길만한 것들도 한껏 있었다. 이제 만 4세가 된 엘리는 디즈니 공주들의 왕팬이 되었다. 디즈니월드에 유니버설 스튜디오까지 다녀오면 엘리가 좋아하겠지. 게다가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집필한 키웨스트(Key West)까지. 만약 가능하면 바하마까지 가는 크루즈도 타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뭐? 샌프란시스코에서 올랜도까지 왕복 항공료가 1인당 800달러?”
평소 200달러면 갈 수 있던 구간이었다. 팬데믹 직후, 사람들이 다시 여행을 시작하면서 항공권 가격이 조금씩 오르긴 했지만, 800달러는 너무했다.
연말 성수기라고는 해도, 4배 오른 가격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알고 보니, 크리스마스 전후는 미국 내에서 항공권이 가장 비싼 시기. 여행 수요가 급증하면서, 2022년에는 평년 대비 항공료가 평균 2~3배까지 뛰었다고 한다. 우리가 가려던 그 주간은 '초성수기 중의 초성수기'였다.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디즈니 근처의 평범한 3성급 호텔조차 하룻밤에 350달러. 예약 사이트에선 “남은 객실 1개!” 같은 문구가 떠 있었고, 평소 150~200달러 하던 호텔도 눈 깜짝할 사이에 2배로 올랐다.
연말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은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몰리는 시즌이란 걸 온몸으로 실감했다.
크루즈는 더했다. 카리브해를 도는 7박 8일짜리 크루즈, 발코니 객실 기준 1인당 2,000달러. 세금과 팁을 포함하면 실제 지불금액은 그 이상이었다. 당연히 연말 크루즈는 1년 중 가장 인기 있는 일정이고, 2022년은 특히 코로나로 억눌렸던 해외여행 수요가 폭발한 해였다.
우리가 셋이서 일주일 여행을 가려면 항공권, 호텔, 크루즈만 해도 최소 7,000달러. 여기에 식비, 교통비, 입장료 등까지 합치면 금세 1만 달러에 육박했다. 2022년 말 환율이 1,300원을 넘겼으니, 단순 계산으로 거의 1천만 원짜리 가족 여행이었다.
그만한 돈을 단 한 번의 여행에 쏟아부을 여유는 없었다.
설사 여유가 있었더라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미국인들로 북적이는 휴양지를 향해 떠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며칠 후, 남편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분함과 슬픔을 동력 삼아서 열심히 공부해야겠어. 내년에는 변호사 되어서 제대로 여행 가자."
그런데 그 '열심히'가 문제였다.
12월 초, Civil Procedure 기말고사 준비에 들어간 남편. Harvard JD 출신의 젊은 여자 교수님은 소문대로 깐깐했다. 과목 자체도 어려운 데다 교수님의 기대치도 높았다.
남편은 아침부터 밤까지 목을 앞으로 쭉 빼고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어느 날 저녁, 남편이 목을 움켜쥐며 신음했다.
"아... 목이..."
"왜? 또 아파?"
"도저히 못 움직이겠어. 너무 아파..."
목디스크였다. 30대 중반의 몸으로 20대처럼 공부하다 생긴 부작용이었다.
며칠 후, 엘리를 데리고 데이비스에서 가장 큰 Mary L. Stephens 도서관에 들렀다. 거기서 남편 동료의 와이프를 만났다. 7살짜리 남자애를 데리고 책을 읽으러 왔다고.
"저희 남편도 Bar 준비하다가 허리디스크 왔었어요."
"어떻게 하셨어요?"
"데이비스에 괜찮은 침술원(acupuncture)이 있어요. 학교 보험도 되고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에게 당장 가라고 했다. 하지만 보험 처리를 위해서는 먼저 학교 내 Student Health and Wellness Center에서 referral을 받아야 했다.
센터에서 만난 인도계 의사 선생님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좋은 선택이에요. 미국인들 중에서는 침술이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꽉 막힌 사람 아니에요. Acupuncture도 훌륭한 치료법이죠."
그러면서 목보호대도 처방해 주셨다. 이게 또 신의 한 수였다.
"이거 정말 좋아. 공부하다 보면 자꾸 고개가 숙여지는데, 이게 받쳐주니까 훨씬 편해."
침술원도 효과가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다니면서 목 상태가 조금씩 나아졌다.
< 미국 유학생 의료 팁 >
장시간 공부로 인한 디스크는 유학생들의 고질병!
- 대부분의 학교 보험이 침술(acupuncture) 커버. 단, 학교 Health Center에서 referral 필수
- 목/허리 보호대는 CVS나 Walgreens에서도 구입 가능
- 무엇보다 예방이 최선: 1시간마다 스트레칭 필수
그렇게 우리의 겨울방학은 플로리다가 아닌 데이비스에서, 해변이 아닌 도서관과 침술원을 오가며 시작됐다.
겨울의 데이비스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 많다. DPNS도 Holiday Season이라며 2주간 문을 닫았다. 남편은 목 보호대를 하고 도서관으로 향했고, 나는 엘리와 집에 남았다.
"아빠 어디 가?"
"공부하러 도서관 가."
"엘리도 갈래."
"도서관은 조용히 해야 하는 곳이야. 아빠 공부 방해하면 안 돼."
만 4세 엘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시무룩했다.
그 겨울, 우리는 어디도 가지 못했다. 남들은 다 떠난 크리스마스 시즌에 우리만 데이비스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겨울이 있었기에 남편은 Bar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 우리는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엘리에게 미안한 마음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737일의 미국 생활은 늘 그랬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
가끔 엘리가 묻는다.
"엄마, 미국에서 찍은 사진들 보면, 우리 다 웃고 있다?"
"응, 진짜 좋은 추억이고, 시간이었어. 우리 엘리도 이렇게 훌륭하게 컸는걸?"
다행히 아이는 그때를 나쁘게 기억하지 않는다. 어쩌면 부모의 미안함이 만들어낸 죄책감일지도.
그 겨울방학의 플로리다는 결국 2025년에도 여전히 가보지 못한 곳으로 남아있다. 언젠가는 꼭 가리라 다짐하며, 오늘도 그때의 아쉬움을 글로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