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대신, 집을 구경하기로 했다

집을 살 것도, 살 것도 아닌데 한 바퀴 돌고나면 기분이 좋아져.

by 유지니안

박사과정 진학을 포기하고 나서 하루하루가 그저 살아지는 느낌이었다.

간절히 원하던 걸 얻지 못한 그 상실감이 겨울방학 여행 불발로 인한 우울함과 겹쳐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엄마, 놀아줘요."

거실 바닥에 앉아 블록을 만지작거리던 엘리가 나를 올려다봤다.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가슴이 찌릿했다. 그래, 나는 엄마다. 무너져 있을 시간이 없다.




며칠 만에 해가 나온 어느 날, 답답한 마음에 엘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West Manor Park 아파트 바로 옆 단독주택 단지를 산책하다가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For Sale'

말끔한 앞마당을 가진 단독주택 앞에 판매 표지판이 꽂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단독주택은 어떻게 생겼을까?'

데이비스에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만약 단독주택으로 갈 수 있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곧 아파트 계약 연장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직 단독주택 내부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엘리 친구 페이지 집과 Katy 할머니 집, 두 번 정도?

문득 다른 집들은 어떻게 생겼을지 호기심이 일었다.

"엘리야, 저 집 구경 가볼까?"

"네!"

표지판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오늘 오후에 Open House가 있다고 했다. 몇 시간 후,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

입구에서부터 감탄이 나왔다. 높은 천장, 넓은 거실,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잘 가꿔진 뒷마당.

부동산 에이전트가 친절하게 집을 안내해 주었다.

"이 집은 4 bedroom, 2 bathroom예요. 1980년대에 지어졌지만 최근에 리모델링을 했어요."

우리가 살던 2베드룸 아파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각 방마다 창문이 크게 나 있어 햇살이 가득 들어왔고, 주방은 아일랜드 식탁까지 갖춰져 있었다.

"엄마, 이 집 좋아!"

엘리가 넓은 거실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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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집 구경이 나의 작은 일탈이 되었다. DPNS가 끝나면 데이비스 곳곳의 Open House를 찾아다녔다.

"와, 이 집은 2층이네!"

어느 날, Cycamore Lane 근처의 집을 구경하며 감탄했다. 계단을 올라가니 2층에도 방이 3개나 있었다.


다음 주에는 더 놀라운 집을 발견했다..

"6 bed, 3 bath? 뒷마당에 수영장까지..."

물론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수영장은 검은색 천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위용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모든 집이 아름다운 건 아니었다.

"으... 이 집은 좀..."

어느 날 방문한 집은 관리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벽지는 곰팡이로 얼룩져 있고, 카펫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엄마, 무서워요."

엘리가 내 다리를 꼭 붙잡았다. 우리는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 데이비스 단독주택의 특징 >
- 대부분 최소 4 bedroom으로 설계
- UC Davis 교수진을 위해 계획된 주거 지역이 많음
- 오래된 농촌 소도시의 특성상 넓은 부지에 큰 집들이 기본
- 판매 가격: 80만-150만 달러 (2022년 기준)
- 월세: 3,500-5,000달러




집 구경을 하면서 잠시나마 그동안의 우울을 잊을 수 있었다. 마치 다른 삶을 엿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항상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그 짧은 환상은 금세 사라졌다.

'이런 짓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Zillow와 Realtor.com을 뒤졌다. 혹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월세의 단독주택이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데이비스의 단독주택들은 하나같이 3인 가족이 잠깐 머물기에는 너무 크고 비쌌다.

4 bedroom 집의 월세가 최소 3,500달러. 우리가 내던 아파트 월세의 두 배가 넘었다.


저녁 식사 시간, 남편에게 그날 본 집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신나게 떠들었다.

"여보, 오늘 진짜 대박인 집 봤어! 뒷마당에 레몬 나무가 있고, 주방이 우리 집 거실만 해. 아일랜드 식탁도 있어서 요리도 편할 듯!"

"오... 얼마래?"

"98만 달러."

"..."

"..."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14억 원 정도 하네... 데이비스도 집 값 진짜 비싸다."

남편이 반찬을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며칠 후, 주말에 남편도 집 구경에 동행했다. 오랜만에 공부를 제쳐두고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가 신난 느낌이었다.

"와... 이거 뭐야. 차고가 차 3대가 들어가네?"

처음 단독주택을 본 남편의 반응이 재밌었다.

"봐봐, 이 walk-in closet. 우리 집 안방보다 커."

우리는 마치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이 방 저 방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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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남편이 갑자기 픽 웃었다.

"뭐가 웃겨?"

"아니, 우리 완전 시골 쥐가 도시 구경 온 것 같아서."

"근데 우리는 도시 쥐도 시골 쥐도 아니고 그냥... 유학생 쥐?"

"푸하하, 그것도 가난한 유학생 쥐!"

우리는 차 안에서 한참을 웃었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남편이 말을 건넸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로 짓고, 에어컨도 천장에 달려 있고, 아일랜드 식탁은 기본에다가 주차장도 지하에 연결되어 있는 신축 아파트가 우리집인데 뭐가 그렇게 신기하고 재밌었나 몰라."

"그래도 우리가 구경한 집들이 한국에 있는 우리 집보다 비싸네요."

"그러게... 한국과 미국의 소득 차이가 여기서 또 느껴지네"

"..."

"그래도 재밌었어. 오랜만에 막 설레고."

"빨리 여보 기말고사 끝나면 좋겠다. Katy 할머니가 그러는데 Dixon 가는 길에 크리스마스 테마파크?를 한다고 하더라고. 우리 거기에 한 번 가보자."

"좋지. 나도 공부 좀 그만하고 싶다... 다 늙어서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네."

"누구는 하고 싶어도 못하는 공부인데, 말 좀 가려서 하지?"

"...미안."

남편이 멋쩍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오늘 본 집들의 높은 천장이 떠올랐다. 우리 아파트의 낮은 천장과는 달리, 거기엔 꿈을 담을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집 구경'이라는 이상한 취미가 생겼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러 상실감도, 겨울방학 여행을 못 가는 아쉬움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우리에겐 아직 '언젠가는'이라는 희망의 단어가 남아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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