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375도 오븐에서 데이비스 겨울을 구웠다

김장, 베이킹, 그리고 낯선 곳에서 익어가는 나

by 유지니안

"수지, Student Farm에서 받은 채소들이 남는데, 혹시 먹을래?"

Sara가 가져온 봉지를 열어보니 배추 두 포기와 서양무 네 개가 들어있었다.


"음... 배추는 된장국 끓이고, 무는 깍두기라도 만들까?"

그런데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재료 사러 KP market을가야 하는데, 차라리 제대로 김장을 해보면 어떨까? 미국에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한 번도 김치를 직접 담가본 적이 없었다.


"여보, 우리 김장 한 번 해볼까?"

"김장? 갑자기?"

"Sara가 배추랑 무 가져다줬는데, 이참에 제대로 한 번 해보자. 어차피 김장철이잖아."

남편도 흥미를 보였다. 한국에서는 반찬가게에서 김치를 사 먹던 우리가 미국 땅에서 김장이라니, 왜인지 모르겠지만 신이 났다.


< UC Davis Student Farm >
캠퍼스 내에 있는 23 에이커 규모의 100% 유기농 교육 농장으로, 채소, 과일, 허브, 꽃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1977년부터 학생들이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토요일 Farmer's Market에서 직접 판매된다. 한편,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프로그램도 운영 중으로, 지역 주민들이 구독하면 매주 제철 채소 박스로 제공된다.


토요일 아침, 가족과 함께 KP mart로 향했다. 본격적인 김장을 위해서는 더 많은 재료가 필요했다.

"배추 3 포기 더 사고, 무는... 아, 여기 한국 무 있네!"

"삼게액젓? 이게 만능 액젓이래. 새우젓이나 멸치액젓 대신 이거 써도 될 것 같은데."

"고춧가루하고 굵은소금은 한국에서 부친 짐에 있더라."

마늘은 코스트코에서 대량으로 파는 깐 마늘을 집에서 초퍼로 다져 냉동실에 보관해 두고 쓰고 있었다.

"찹쌀풀은 어떻게 하지?"

"밥 좀 질게 해서 넣으면 안 될까?"

"오, 그거 괜찮은데?"

유튜브에서 급하게 검색한 '미국에서 김장하기' 영상을 참고하며 계획을 세웠다.


집에 돌아와, 드디어 김장 대작전이 시작됐다.

그래도 유튜브 영상을 본 내가 양념을 만드는 게 낫겠다 싶었다. 배추랑 무를 절이는 것은 아무래도 힘이 필요하니까 남편이 더 잘할 것 같았고.

"자, 나는 양념을 만들 테니까. 당신은 배추랑 무를 절여줘."

남편도 팔을 걷어붙였다. 그런데...

무가 딱딱한 게 맛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소금을 너무 적게 넣어서 제대로 절여지지 않았던 것.

"소금 좀 더 넣어, 아끼지 말고. 이 짠돌아!"


나는 그 사이 양념을 만들었다. 질게 지은 밥을 믹서에 갈고, 고춧가루, 다진 마늘, 생강(트레이더 죠에서 샀다), 삼게액젓을 넣고 섞었다. 붉은 양념이 완성되자 부엌이 온통 김장 냄새로 가득 찼다.

"엄마, 아빠, 뭐해요?"

엘리가 발치에서 빙빙 돌며 구경했다. 만 4살, 호기심 가득한 나이. 혹시라도 양념 그릇을 엎거나 하는 대형사고가 날까 봐 걱정되었다.

"엘리야, 저기 가서 티비 볼래? 겨울왕국 틀어줄게."

평소엔 티비를 잘 안 보여주는데, 오늘은 특별 허가.


2시간의 사투 끝에 드디어 김장이 끝났다. 배추김치 세 포기, 깍두기, 그리고 보너스로 만든 오이지까지.

다 절여진 채소들에 같은 양념을 발랐더니 맛이 비슷할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처음 해본 김장치고는 꽤 그럴듯해 보였다.

"Katy 할머니랑 Sara한테 좀 나눠주자."

Sara와 Katy 할머니의 동생, Barby는 K-드라마 광팬이었다. 무엇보다 Sara의 아이들은 페루에서 살았었기 때문인지 매운 음식도 잘 먹는다고 들었다.


다음 날, 통에 담은 김치를 들고 친구네 집들을 방문했다. 먼저 방문한 곳은 Katy 할머니네 집!

"이거 김치에요. 종전에 만든 것은 겉절이 형식이고 이건 발효시키는거에요!"

Katy 할머니께 설명하며 김치통을 건넸다.

"직접 만든 거야?"

"네. 일주일 정도밖에 두었다가 드세요. 지금은 아직 맛이 안 나요."

Sara에게도 똑같이 당부하며 김치를 나눠줬다.


그런데 이틀 후, Katy 할머니가 우리를 보자마자 엄지를 치켜들었다.

"수지! 김치 정말 맛있더라! 매콤한 샐러드 맛이 나더라고."

"샐러드요? 아, 김치 벌써 드셨어요?"

"응, 바로 먹어봤지!"

"할머니... 일주일 후에 먹으라고 했잖아요..."

갓 담근 김치를 바로 먹어버린 할머니. 짜고 맵고 아삭한 날배추 맛이었을 텐데. 그래도 맛있다고 하시니 다행이었다.


일주일 후 다시 만난 Katy 할머니가 말했다.

"이제야 진짜 김치 맛을 알겠어! 처음 먹었을 때랑 정말 달라!"

우리 첫 김장김치가 맛있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김장을 끝내니 한겨울이 다가왔다. 한국에서 겨울 하면 김장이지만, 미국에서 겨울은 베이킹의 계절이었다.


어느 날 저녁, 밖은 영상 5도. 집 안도 썰렁했다. 문득 오븐을 켜고 싶어졌다.

375도로 예열을 시작하자 부엌이 서서히 따뜻해졌다. 그 온기가 거실까지 퍼지면서 집 전체가 포근해지는 기분이었다.

"Katy 할머니한테 배운 컵케이크나 만들까?"


매주 금요일 Katy 할머니와의 쿠킹 클래스에서 새로운 레시피를 배웠다. 컵케이크, 애플파이, 진저브레드, 레몬 파운드케이크, 생크림 케이크... 나도 Katy 할머니에게 한국음식 레시피를 가르쳐주기 위해 나물이나 비빔밥, 불고기 등 평소에 직접 하지 않던 음식들도 시도하게 되었다.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은 늘 즐겁고 유익했다. 베이킹이라고는 1도 모르던 내가, 어느새 빵 만드는 취미가 생길 정도로 말이다.

"오븐 온도가 정확한지 확인하려면 온도계 하나 사. 10달러면 돼."

"유산지 깔면 설거지가 반으로 줄어."

"베이킹은 계량이 생명이야. 계량컵과 계량스푼, 전자저울은 필수니까 가지고 있어야 해."

"Brown sugar를 넣으면 쿠키가 쫄깃해지고, white sugar만 넣으면 바삭해져."


"띵"

12분 후, 오븐이 울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Katy 할머니와의 쿠킹클래스를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오븐이 내뿜는 열기에 몸도 따뜻해졌다.

갓 꺼낸 컵케이크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달콤한 향이 집 안 가득 퍼지면서, 박사과정 포기로 가라앉았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 겨울, 거의 매주 무언가를 구웠다. 바나나 브레드, 블루베리 머핀, 브라우니, 시폰케이크까지... 실패작도 많았다. 첫 브라우니는 돌처럼 딱딱했고, 시폰케이크는 너무 단단하고 푸석푸석했다.

"의외로 단단한 케이크도 갓 구우니까 맛있는데?"

남편의 농담에도 웃을 수 있었다. 실패해도 괜찮았다.

따뜻한 오븐과 달콤한 냄새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됐으니까.


플로리다 대신 데이비스의 부엌에서 보낸 그 겨울.

하지만 김장 김치와 따뜻한 베이킹, 그것을 나눌 이웃이 있어서 전혀 춥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은 정말 몸과 마음을 녹인다. 특히 낯선 땅의 추운 겨울에는 더욱 그렇다.

375도로 예열된 오븐에서 나오는 온기와 달큰한 냄새, 그리고 뽀글 뽀글 조금씩 익어가는 김치. 그것들이 우리의 두 번째 데이비스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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