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동지날 팥죽과 도어 딩 (1)

액운을 쫓으러 갔다가 액운을 만난 날

by 유지니안

"이번 동지엔 꼭 팥죽 먹어야 해."

12월 중순, 나는 굳은 결심을 했다. 미국에 온 지 1년, 우리 가족은 완전히 지쳐있었다.

남편은 목 디스크로 고생하면서도 Bar 시험 준비에 매달려야 했고, 나는 박사과정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처음 사귄 친구 제시와는 완전히 틀어져 이제는 마주치면 서로 못 본 척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엘리가 DPNS에 잘 적응했다는 것. Teacher Becky는 엘리가 이제 완전히 학교에 녹아들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She's doing great! Such a lovely girl!"

하지만 엄마인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딸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영어가 서툴러도 웃으며 친구들과 어울리려 애쓰는 그 작은 등이 얼마나 대견하면서도 짠한지.


액운을 날려보내고 싶었다. 한국에서라면 동지에 팥죽을 먹으며 한 해의 나쁜 기운을 쫓아냈을 텐데. 미국 슈퍼에서 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그때 문득 떠오른 곳이 있었다.

"Oto's Marketplace라고 새크라멘토에 일본 슈퍼마켓이 있는데, 거기가 물건도 좋고 도시락도 맛있어."

예전에 일본인 친구 미요가 알려줬던 그 곳이다. (#43 참조)


한동안 주말에 새크라멘토에 놀러갈 일이 생기면 Oto's에서 도시락을 많이 사 먹었다.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싸고, 팁도 없었을 뿐더러, 맛도 좋았으니까. 특히 남편은 닭튀김(가라아게)를 좋아했고, 나와 엘리는 생선가스(사카나후라이)가 입맛에 맞았다.

그날도 평소처럼 장을 보고 있었다. 팥죽에 들어갈 팥은 물론이고, 온 김에 쌀이며 생선 등 식료품들을 하나씩 하나씩 카트에 담았다. 엘리는 과자 코너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남편은 도시락 코너를 서성였다.




"RAV4 hybrid 차 주인 있나요?"

입구 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솔직히 나는 잘 안 들렸는데, 남편이 용케 들었는지 "잠깐 갔다올게" 하고는 마켓을 나섰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가 "아빠 어디 갔어?"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엘리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주차장에서 남편이 보안직원, 그리고 50대로 보이는 라티노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보, 무슨 일이야?"

"어, 이분이 우리 차를 긁어서."

What? 우리 차를 긁었다고?

나는 다급하게 우리 차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일단 엘리 데리고 마트 안에 들어가 있어. 내가 처리하고 갈게."

단호한 남편의 말에 일단 마트로 돌아왔다. 담아둔 물건들을 계산하려고 줄을 서는데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액운을 쫓으러 왔다가 사고를 당하다니. 이게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계산을 막 시작할 때쯤 남편이 돌아왔다.

"상대방이 주차하다가 우리 차 옆을 살짝 스쳤나봐."

핸드폰 사진을 보여주는데, 하얀색으로 길게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누가 봐도 확실히 긁은 흔적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일단 사진이랑 영상부터 찍어뒀고, 상대방 신분증이랑 보험서류 사진 찍어뒀어. 우리는 잘 주차해둔 상태에서 긁은 거니까 상대방 100% 책임이지 뭐."

남편이 덧붙였다.

"보안직원 바로 앞에서 일어난 일이라 뺑소니 못 친 것 같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운이 좋았다고? 차가 긁혔는데? 하지만 미국에서는 주차장 사고 후 그냥 도망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남편은 계속 차를 들여다봤다. 몇 장의 사진을 더 찍고는 한숨을 쉬었다.

"팥죽 먹고 생각해."

그래, 우리가 새크라멘토까지 간 이유.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 팥죽을 끓였다. 생각보다 달지 않아서 맛보다는 건강과 다복을 기원하며 먹었다. 엘리는 "엄마, 이거 왜 먹어?"라고 물었지만, 떡 하나는 맛있게 먹었다.




"아, 이게 애매하네."

엘리를 재우고 나니 남편이 또 고민에 빠져있었다.

"수리를 맡겨야 할지, 아니면 그냥 대충 닦아서 써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도 깨끗하게 고쳐서 쓰는 게 낫지 않나?"

"미국에서는 괜히 수리해서 이력을 남기는 게 안 좋다는 이야기도 있고... 사람들이 생각보다 사소한 door ding은 수리를 잘 안 하나봐.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애지중지 안 하고 험하게 쓰는 느낌이야."

주차장에서 보면 긁힌 자국 없는 차를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 미국 사람들은 차를 정말 '이동수단'으로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럼 그냥 쓸까?"

"하... 근데 이게 또 그러기에는 마음이 안 좋아서."


며칠을 고민하더니 결국 수리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번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수리 비용을 그냥 돈으로 달라고 할지, 아니면 보험처리로 갈지..."

"그냥 돈으로 받는 게 편하지 않을까?"

"근데 또 왠지 보험처리를 해보고 싶단 말이야. 미국에서 이런 경험을 또 언제 하겠어.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이번 경험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경험'에 목마른 남편. Bar 시험 준비하느라 정신없으면서도 이런 '미국 경험'은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


결국 남편은 보험처리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보험처리는... 충격적이게도 남편이 Bar 시험을 봤던 7월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 미국 자동차 사고 대처법 >
- 사진과 동영상을 최대한 많이 찍을 것
- 상대방 운전면허증과 보험 정보 반드시 확보
- 목격자가 있다면 연락처 받아둘 것
- 경찰 신고는 부상이 없으면 대부분 안 받아줌
- 보험 처리는 정말, 정말 오래 걸림 (최소 3개월)
- Door ding 정도는 대부분 그냥 산다는 마음의 준비 필요


p.s. 12월 22일, 데이비스 빌리지 홈스(Village Homes)에서 "동짓날"을 기념한 행사가 자그마하게 열렸다. 도어 딩으로 속상한 마음 머금은 채 밖으로 나온 우리가 발견한 것은 잔잔한 음악과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푸드트럭과 소박하지만 따뜻한 조명 장식들이었다. 데이비스 사람들의 따뜻한 정 덕분에, 우리 가족의 액운도 멀리멀리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