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보다 반짝였던, 그 소박한 마을의 겨울밤
LA나 뉴욕 같은 대도시라면 크리스마스를 화려하게 보낼 수 있다.
도시는 온갖 조명으로 눈부시게 빛날 것이고, 백화점은 마지막 순간 선물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일 것이다. 거리마다 캐럴이 흐르고, 어디를 가든 반짝거리는 장식이 눈을 사로잡을 것이다.
하지만 소도시, 그것도 낙농업이 주업인 데이비스에서 크리스마스를 맞는 풍경은 사뭇 다르다.
백화점은커녕 대형 쇼핑몰도 없고, 도시 전체를 밝히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건 없다. 겨울이 와도 조용히, 아주 소박하게 시간이 흐르는 곳이다.
그렇다면 이런 미국 시골 마을에 남은 한국인 가족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냈을까.
“Downtown에 산타 온대!”
12월 중순, DPNS 엄마들 사이에서 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마을 중심가에 있는 한 식당에서 크리스마스 아침식사와 산타 사진 촬영 이벤트를 연다는 거였다. 가격은 인당 30달러.
“아침밥 한 끼에 30달러?” 남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여긴 데이비스야. 이런 이벤트도 감지덕지라고. 인기 많아서 예약 빨리 안 하면 마감이래.”
결국 깊은 고민 끝에, 나와 엘리만 가기로 했다.
예약한 날 아침, 폭풍우를 뚫고 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아준 건 빨간 모자를 쓰고 선물을 나눠주고 있던 ‘산타 언니’였다. 박스 안에는 각종 인형이 가득 들어 있었고, 엘리는 그중 조그만 흰색 북극곰을 골랐다.
안으로 들어서자 뷔페 테이블이 길게 차려져 있었다. 팬케이크 몇 장, 갓 구운 듯 보이지만 약간은 마른 빵, 생각보다 질긴 베이컨, 그리고 유리 그릇에 담긴 오렌지 조각들. 솔직히 말해 맛은 그냥 그랬다. 과연 30달러의 값어치를 하느냐 하면, 고개가 갸웃해졌다.
“Ellie!”
드디어 산타와 사진을 찍을 차례가 왔다. 엘리는 산타 할아버지가 무서운지 몸을 바짝 웅크린 채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내가 “엘리야, 스마일! 김치!”를 외쳤지만, 그 얼굴은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다시 보니 오히려 웃겼다. 빨간 옷의 거대한 산타 옆에서 겁먹은 토끼 같은 얼굴로 앉아 있는 우리 딸. 사진을 본 남편이 한마디 했다.
“이 돈이면 코스트코에서 장난감 다섯 개는 샀겠다.”
“…크리스마스 추억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야.”
며칠 뒤, Alison이 전화를 걸어왔다.
“Dixon에 크리스마스 테마 농장이 있어. 거기라도 한번 가보는 게 어때?”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플로리다 여행도 못 가서 조금은 울적했던 올해 크리스마스에, 작은 모험 같은 계획이 생긴 기분이었다.
남편의 기말고사가 끝난 주말, 우리는 차를 타고 데이비스 근처의 소도시 딕슨으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그곳은 알고 보니 크리스마스 트리를 키우는 묘목장이었다. 입구 주변과 작은 건물들은 빨강과 초록 페인트로 단장돼 있었고, 진저브레드 장식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멀리서 루돌프 사슴이 끄는 산타 썰매가 보였다. 실제 썰매는 아니었지만, 원동기를 개조해 만든 귀여운 장식이었다. 하지만 엘리의 관심은 금세 실내 놀이터로 향했다.
“꾸미틀!”
아직 미끄럼틀을 ‘꾸미틀’이라고 부르는 네 살 아이는, 신이 나서 미끄럼틀 위를 오르락내리락했다.
남편이 아이와 놀아주는 사이, 나는 gift shop으로 들어가 보았다. 오너먼트와 장식품, 작은 인형들이 가득 진열돼 있었고 트리를 사지 못하는 대신 자그마한 오너먼트를 하나 샀다. 나중에 트리를 꾸미게 되면 이 오너먼트를 걸면서 이때를 기억할 수 있겠지?
밖으로 나오니 엘리가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코코아였다.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고 했다. 평소 초콜릿을 잘 주지 않아서 조금 망설였지만, 크리스마스인데 뭐. 날씨도 제법 쌀쌀해서 나도 한 잔 받아들었다.
농장 안쪽으로 들어가니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줄지어 자라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아기 예수 탄생 장면을 재현한 베들레헴 마을 모형이 있었다. 순간, ‘아, 역시 미국은 기독교의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 남편이 물었다.
“여기 입장료 있었어?”
“없었어. 코코아도 공짜였고.”
“뭐야, 그럼 뭘로 돈 버는 거야?”
“트리 팔아서? 아니면 그냥 동네 사람들 서비스?”
알고 보니 이런 트리 농장들이 데이비스 주변에 꽤 있었다. 12월만 되면 무료로 개방해서 가족들이 와서 놀다 가게 한다고. 트리를 사가는 사람도 있고, 그냥 구경만 하는 사람도 있고.
“LA나 뉴욕이었으면 입장료만 30달러는 받았겠다.”
“아침 먹는데 30달러인데, 그 정도는 기본이지.”
“아 진짜! 그믄 즘 늘르르!”
그런데 데이비스 크리스마스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여보, 이거 봐! 올해 크리스마스 라이트 지도가 나왔대.”
‘2022 Davis Holiday Lights Map’. Davis Enterprise에서 매년 발행하는, 주민들이 직접 꾸민 집들을 모아 최적의 동선까지 표시해둔 일종의 ‘빛의 여행 가이드’였다. A4 용지 위에 파란색으로 표시된 루트를 따라가면, 가장 볼 만한 집들을 순서대로 구경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엘리야, 반짝반짝 예쁜 집 구경 가자!"
남편은 우리 아파트 주변은 나중에도 볼 수 있으니, 지도 반대편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그럴싸한 말이었다.
첫 번째 집은 지붕 라인을 따라 흰 전구가 매달려 있고, 앞마당에 빨간 산타와 순록이 서 있는, 꽤나 평범한 장식이었다. 엘리는 “루돌프다!” 하며 환호했지만, 나는 ‘데이비스에서 뭘 바라겠어’ 하며 살짝 기대를 접었다.
그러나 그다음 집부터는 입이 절로 벌어졌다.
4350 Cowell Boulevard. 앞마당 전체가 ‘피너츠’ 캐릭터로 가득했다. 지붕 위에서 타자를 치는 스누피, 크리스마스 트리를 끌고 가는 찰리 브라운, 상담 부스를 연 루시까지. 무려 30년 동안 모은 컬렉션이라 했다.
"잠깐, 라디오를 FM 106.9로 맞춰봐."
지도에 적힌 대로 라디오를 FM 106.9로 맞추자 ‘Jingle Bells’가 흘러나왔고, 집 전체의 조명이 음악에 맞춰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와! 엄마, 집이 춤춰요!"
매시 정각마다 라이트 쇼를 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우리는 운 좋게 8시 쇼를 본 것이었다. 차 안에서 10분간 넋을 놓고 구경했다. 뒤에 차들이 줄을 섰지만 아무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다들 똑같이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 뒤로 가는 곳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엘 마세로(El Macero)의 부촌에서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다 황금색 전구를 감아 마치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했고, Valerosa Way에서는 ‘겨울왕국’ 세상이 펼쳐졌다. 엘사와 안나, 올라프, 스벤이 앞마당을 가득 메우고, 인공 눈이 내렸으며, 창문 홀로그램 속 엘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아이들은 “Let it go”를 합창했고, 우리 차는 잠시 작은 콘서트홀이 됐다.
Loyola Drive에서는 산타의 작업장을 재현해놓았는데, 움직이는 엘프 인형들이 장난감을 만들고 있었고, 진짜 산타 복장의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캔디케인을 나눠주고 있었다.
마지막 목적지인 Marina Circle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집’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는 순록들, 계속 내리는 인공 눈, 움직이는 산타… 마치 작은 놀이공원 같았다. 하지만 엘리는 이미 차 안에서 잠들어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깨우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밤 9시가 훌쩍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엘리는 차에서 이미 꿈나라로.
"여보, 몇 집이나 봤어?"
"지도에 있는 것만 열두 집? 가는 길에 본 것까지 하면 스무 집은 넘을걸."
"진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야."
"만약 플로리다 여행 갔으면 이 조그만 도시 데이비스에 이런 매력이 있는 줄 몰랐을 거야"
그해 크리스마스, 우리는 비싼 선물도 사지 못했고, 여행은 커녕 사고와 질병과 우울과 함께였다. 그리고 이렇게 알록달록 예쁘게 꾸민 집들을 구경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하는 서글픔도 생겼다. 우리도 남들처럼 멋지게 크리스마스 장식을 꾸미고 싶었으니까. 그저 구경만으로 그쳐야 했던 크리스마스, 그 기억은 우리를 데이비스의 이방인으로 더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그래도 데이비스 주민들이 각자의 집을 무대로 펼친 빛의 향연은, 그 어떤 대도시의 화려함과도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온 동네가 하나의 거대한 테마파크가 되는 경험, 그리고 그 안에서 웃고 있는 우리 가족.
그 웃음은, 여전히 마음 어딘가에서 반짝이고 있다.
< 데이비스 크리스마스 완벽 가이드 >
- Holiday Lights Map: 매년 12월 Davis Enterprise 발행 (베스트 타임: 저녁 7-9시)
* 필수 코스: 4350 Cowell Blvd (FM 106.9 필수!)
- 크리스마스 아침 + 산타 사진찍기 이벤트: 인당 $50
- Dixon Tree Farm: 입장료 없음, 코코아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