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으로 시작해 고민으로 끝난 12월
"엘리 크리스마스 선물 뭐 해줄 거야?"
12월 중순, 기말고사가 끝나고 소파에 늘어져 있던 남편에게 물었다.
"글쎄, 뭐가 좋을까."
사실 고민할 게 뭐가 있나. 돈이 남아돈다면야 이것저것 사주겠지만, 유학생 가족에게 크리스마스 선물 새로 사는 건 사치였다.
"우리 엘리, 뭐 만들고 이런 거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맞아. 지난번에 ○○이네가 줬던 맥포머스, 하루 종일 가지고 놀더라."
"아, 그러고 보니 레고랜드에서 샀던 레고 있잖아. 레고랜드 모형 만드는 거."
"그거? 너무 어려워서 못 할 것 같아서 숨겨뒀던 거?"
"이제 만 4세니까 할 수 있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자."
옷장 깊숙이 숨겨뒀던 레고 상자를 꺼냈다. 레고랜드를 미니어처로 만드는 세트. 당시 큰맘 먹고 130달러나 주고 샀는데, 대상 연령이 8세 이상이라 보관만 하고 있었다.
엘리가 낮잠 자는 틈을 타서 포장하러 gym으로 향했다. 우리 Portage Bay 아파트는 이럴 때 참 좋았다. Leasing office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포장지랑 테이프, 리본까지 다 준비해뒀다.
'이런 센스는 정말 미국답다.'
에메랄드 색 포장지에 금색, 초록색, 빨간색 리본 꽃장식까지 붙여서 완벽하게 포장하고 돌아왔다.
"엄마, 내일 정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주는 거야?"
잠에서 깬 엘리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응, 밥 잘 먹고 코 자고 나면 산타할아버지가 몰래 와서 선물 놓고 갈 거야."
밤 11시. 엘리가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하고 선물을 놓으려는데, 둘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트리 팜(Tree Farm) 갔을 때 조그마한 거라도 하나 샀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럴 돈이 어딨냐. 거기 제일 작은 트리도 50달러던데."
결국 빨래 건조대 밑에 선물을 뒀다. 한국에서 가져온 Made in Korea. 이게 우리 집 크리스마스트리가 될 줄이야.
아침 6시.
"엄마! 아빠! 일어나요! 선물이다!"
엘리가 우리를 흔들어 깨웠다. 빨래 건조대 밑에서 선물을 발견한 모양이다.
찢어지는 포장지 소리, 설레는 표정. 그런데...
"이게 뭐야?"
상자를 열고 나서 엘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나 레고 안 좋은데... 공주 좋은데..."
레고 블록이 아니라 진짜 공주 인형을 원했던 거였다. 게다가 상자를 자세히 보니 '8+ years'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 만들면 레고랜드처럼 돼!"
아무리 설명해도 엘리는 시큰둥했다.
그 레고는 한국으로 가져왔고, 지금도 창고에 포장도 제대로 안 뜯은 채로 있다. 레고랜드에서 130달러 주고 산, 한 번도 안 만들어본 추억. 언젠가는 레고랜드를 만들 날이 오겠지, 엘리야...?
미국 박사는 포기했지만, 한국 돌아가서라도 박사는 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 온 김에 영어 시험이라도 봐두고 싶었다. 남편이 석사 입학 준비로 봤던 IELTS 책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나도 IELTS로 정했다.
시험장을 찾아보니 제일 가까운 곳이 샌프란시스코.
"겸사겸사 대도시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보고, 하룻밤 자고 오자."
그런데 출발 3일 전부터 엘리가 콜록콜록. 열까지 나기 시작했다.
"취소할까?"
"시험비가 300달러야. 호텔도 이미 예약했고. 취소 수수료도 있어."
다행히 당일 아침엔 열이 내렸다.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응급실에 가야 했을 텐데, 이제야 좀 면역력이 생겼나보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호텔로 향했다.
엘리가 아파서 외부 일정은 모두 취소. 엘리는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지, 호텔에 와서 잠부터 잤다. 나는 IELTS 벼락치기 공부. 평소엔 엘리 때문에 책 한 줄도 제대로 못 읽었다
저녁은 근처 중국 음식으로 정했다. Yelp에서 별점이 높은 Hon's Wun-Tun House에서 새우 완탕면과 돼지고기 볶음면을 시켰다. 방에서 쉬고 있던 남편이 할 일이 생겼다. 바로 음식 가져오기. 팁까지 하면 50달러는 족히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먹고 다시 책을 펴는데 남편이 벌떡 일어났다.
"아, 맞다! 오늘 사이버대 시험이야!"
남편은 아직도 한국 사이버대 법학사를 못 끝냈다. 미국 오기 전에도 말썽이었는데, 오고 나서도 사이버대 졸업을 못해서 새벽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봐야 했다. 그런데 하필 기말고사가 오늘이라니.
남편은 일찍 잠을 청하고, 혼자 남아 IELTS 시험 준비를 계속했다.
문단 하나를 읽는 데만 거의 5분이 걸렸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단어 하나 외우려면 열 번은 봐야 했다. 방금 읽은 것도 돌아서면 까맣게 잊어버렸다.
‘육아하는 동안 뇌가 녹아버린 걸까?’
예전엔 논문 한 편을 후딱 읽고, 주요 논지를 머릿속에 구조화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이제는 영어 시험용 짧은 지문조차 버겁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붙잡고 의미를 해부하듯 들여다보지만, 집중력은 3분을 넘기지 못하고 흩어졌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얼기설기 엉켜, 의미 없는 소음처럼 웅웅거린다.
잠시 펜을 내려놓고 책상 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불안한 마음에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해보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아침 8시. 남편은 새벽 4시에 시험을 보고 나서 계속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편이 가져다 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체크아웃했다.
그렇게 나는 시험장으로, 남편은 엘리와 오클랜드 동물원으로 향했다.
시험장에 들어가니 분위기가 싸했다. 한국과 달리 감독관들이 무뚝뚝했다. 어찌어찌 시험을 보고 나왔는데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그 때,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시험 잘 봤어?"
남편 전화였다.
"몰라. 망한 것 같아. 언제 와?"
"30분 후?"
차를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박사? 무슨 박사. 회사 복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온 김에 갈비찜이나 사가자."
"돈이..."
"팁 안 내려고 포장해 갈 거야. 한 번 사면 이틀은 먹잖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데이비스에 있는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갈비찜 냄새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영영 바보가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시험 결과는 6.5. 박사 지원에는 최소 7.0이 필요한데, 재시험을 치르자니 300달러를 또 쓰는 게 아까웠다. 그보다, 다시 준비할 용기가 남아 있을지조차 자신이 없었다.
창밖의 어둠이 마치 나 자신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았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어둠은 묵직했고, 그 속에서 나는 방향도, 출구도 찾지 못한 채 달리고 있었다.
“엄마, 동물원 또 가고 싶어!”
엘리가 동물원에 맛을 들였다. IELTS 시험을 보던 날, 아빠와 함께 Oakland Zoo에 다녀온 후부터 말이다.
데이비스의 작은 놀이터보다 훨씬 넓고, 코끼리, 기린, 곰이 있는 그곳은 엘리의 새로운 ‘최고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12월 말, 우리는 다시 그곳을 찾았다. 데이비스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만, I-80을 타고 서쪽으로 달리자 구름이 조금씩 걷혔다. 오클랜드에 가까워지자 부드러운 햇살이 번졌고, 기온은 18도까지 올랐다. 겨울이라 믿기 어려운 온기였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엘리는 차 문이 열리기 무섭게 고개를 빼고 외쳤다.
“엄마, 기린! 코끼리!”
아직 보이지도 않는데, 마음은 이미 동물원 안에 들어가 있었다. 입구에는 산타 모자를 쓴 직원이 웃으며 티켓을 건넸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군데군데 남아 반짝였다.
매표소 앞에서 남편이 표를 훑어봤다.
“성인 26, 아동 20, 주차 15… 우리 셋이면 거의 100달러네.”
그때 남편이 옆 팻말을 가리켰다.
“연간 멤버십이 174달러래. 신규 회원은 157달러고. 주차 무료, 성인 둘에 아이 넷까지 가능. 두 번만 와도 본전 치고 남겠는데?"
우리는 결국 멤버십에 가입했다. 충동적이었지만, 아이와 자주 갈 ‘안식처’를 산 셈이었다.
언덕길을 따라 오르자 ‘African Savanna’가 펼쳐졌다. 겨울 햇살 속에서 코끼리들이 느릿하게 걸었고, 기린은 부드럽게 목을 뻗어 나뭇잎을 뜯었다. 엘리는 두 손을 흔들며 “기린아, 안녕!”을 외쳤다. 멀리 사자 우리에서는 금빛 갈기가 빛났고, 바람 사이로 원숭이들의 날카로운 울음이 스쳤다.
Oakland Zoo에도 San Diego Zoo 처럼 곤돌라가 있었다. San Diego Zoo보다 규모는 조금 작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니 새와 곰, 사자, 바이슨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엄마! 저기 늑대도 있어!"
그리고 엘리 덕분에 산기슭에 풀어둔 늑대까지 볼 수 있었다.
점심은 중턱의 Landing Cafe에서 먹었다. 엘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핫초코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며 “맛있어!”를 반복했다.
엘리가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장소가 있다. 바로 California Wild Playground. 엘리는 아빠와 숨바꼭질도 하고, 짚라인도 타면서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전 아팠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짚라인을 타다가 떨어졌지만, 씩씩하게 다시 일어나서 짚라인을 더 타고싶다고 하는 엘리. 극 I인 나에게 너무나 버거운 극E 딸내미가 나왔다...
이제 동물원 구경도 다 했겠다, 슬슬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엄마! 저기 회전목마가 있어요!"
그랬다. 동물원에 놀이기구를 가져다 둔 것이다. 우리 엘리가 가장 좋아하는 회전목마를 포함해서, 'Wild Austrailia' 지역을 보러갈 수 있는 기차까지. 놀이기구를 이용하려면 당연히 티켓을 구매해야 했다.
"10개짜리 티켓 주세요"
회전목마를 타려면 티켓 1개가 필요하다. 엘리는 오후 햇살 속에서 회전목마를 5번이나 탔고, 그러고도 질리지 않았는지 계속 타자고 졸랐다.
"우리 기차도 타볼까?"
그렇게 타게 된 호주행 기차. 엘리는 기차가 출발하자 흥분하면서 신나했지만, 너무 피곤했는지 무거운 눈꺼풀과 사투를 벌였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는 햇볕에 데운 코트 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남편은 운전하면서 연신 하품을 했고, 엘리는 차에 타자마자 곤히 잠들었다. 다들 에너지를 바닥까지 사용하는 타입들이라, 온 열정을 다해 놀고나면 저렇게 피곤해하곤 한다.
유튜브에서는 연신 경기침체 우려와 금리 인상 소식이 화면을 채웠다. 곧 끝날거라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미국 물가는 무섭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 겨우 1년인데, 앞으로 1년은 어떻게 버티지.'
그 질문만이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