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Make a lemonade

If life gives you a lemon.

by 유지니안

"오늘도 비네."

남편이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데이비스의 겨울은 비와 함께 온다. 쏟아붓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날도 적지 않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한국의 장마처럼 줄기차게 내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며칠 왔다가, 며칠 쉬었다가. 문제는 그 '며칠'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거다.

"오늘 Duty Day 아니야?"

아, 맞다. 하필이면 오늘이 내 차례다. DPNS에 엘리가 완전히 적응하면서, 나에게는 매일 2시간 남짓의 자유가 주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Duty Day'는 이방인 엄마에게 여전히 긴장되는 과제였다. 부모가 보조 교사 역할을 하는 날. 처음엔 '의무'라는 단어가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엘리의 하루를 직접 볼 수 있는 특별한 날이 되었다.

"비 와도 밖에서 놀려나?"

내심 '오늘은 실내에서만 활동하겠지?' 기대했다. DPNS의 넓은 놀이터(Yard)는 이미 흙탕물로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Teacher Becky는 아이들에게 방수 옷과 장화를 신기더니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내보냈다.

"Let's go outside, friends!"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흙탕물에 첨벙첨벙 뛰어들었다. 장화를 신은 발로 물웅덩이를 힘차게 밟고, 진흙을 뭉쳐 케이크를 만들고, 심지어 누군가는 그냥 주저앉아 흙을 온몸에 바르고 있었다. 어른들은 오늘 밤 빨래 걱정에 한숨을 쉬는데도 말이다.

"Teacher! 이거 괜찮은 거예요?"

내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Becky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They're washable!"

아이들도 빨면 되고, 옷도 빨면 된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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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 요즘 한국의 놀이터는 대부분 우레탄이나 고무 매트가 깔끔하게 깔려 있어 흙을 밟을 일 자체가 드물다. 만약 비 오는 날 아이가 DPNS에서처럼 놀고 왔다면, 아마 그 어린이집은 엄마들의 항의 전화로 불이 났을 것이다. 매일 옷에서 흙이 나오고,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 때문에 예쁜 옷은 엉망이 될 테니 말이다.

"엄마, 나도! 물!"

엘리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미 다른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는데 혼자만 빠질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그래... 가자."


이곳 엄마들이 아이 옷에 비교적 관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아동복 시장이 대형마트와 SPA 브랜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옷값이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다. 타겟(Target), 올드네이비(Old Navy), 카터스(Carter's) 같은 곳에서는 티셔츠 한 장에 5달러, 바지 한 벌에 10달러면 충분히 살 수 있다.

비싼 브랜드 옷을 사서 오래 입히기보다, 저렴한 옷을 여러 벌 사서 한 철 입고 버리거나 기부하는 문화가 보편적이다 보니 아이가 옷을 더럽히는 것에 대한 부담이 훨씬 적은 것이다.


처음 DPNS의 문화를 접했을 때에는 엘리가 감기에 걸릴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는 더 건강해지는 것 같았다. 흙탕물에서 에너지를 쏟아내고 나면 오히려 개운해 보였다.

DPNS의 원칙은 단호했다. 밖에서 신나게 놀되, 실내에 들어오면 곧바로 젖은 옷을 갈아입고 몸의 물기를 완벽하게 닦아낼 것. 그리고 실내 온도는 항상 따뜻하게 유지할 것.

이곳 사람들은 비가 온다고 실내에만 갇혀있는 것이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키우고, 적당히 비를 맞고 노는 것이 오히려 면역력을 높여준다고 믿는 듯했다.


이런 믿음은 미국의 독특한 의료 시스템과도 맞닿아 있었다. 미국 의사들은 항생제 남용을 극도로 경계해,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처방해주지 않는다. 당장 아파서 병원에 가고 싶어도 전화로 예약하면 당일 진료는 거의 불가능하고, 최소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감기는 병원에 가기도 전에 자연치유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 약국에서 의사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OTC, Over-the-Counter)의 종류가 정말 다양하고 체계적이다. 아이들을 위한 해열제(Children's Tylenol/Motrin), 기침 시럽, 코막힘 완화제 등이 잘 구비되어 있어, 대부분의 부모들은 가벼운 증상은 집에서 스스로 관리하는 데 익숙했다.

결국 '내 아이는 내가 지킨다'는 마음으로 평소에 면역력을 키워두는 것이 최선인 셈이다.




2월이 되자 비가 그치고 따스한 햇살이 돌아왔다. DPNS에서는 매달 초, 다음 달 활동 계획이 담긴 달력을 나눠주는데, 이번 달 달력에는 유독 눈에 띄는 날이 있었다.

'Orange Day - Wear Orange & Bring Oranges!'

그날 아침, 엘리에게 주황색 티셔츠를 입혀 보내니 다른 아이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오렌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부모님들 손에는 뒷마당에서 막 따온 듯 싱싱한 오렌지가 담긴 봉지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오렌지 데이가 뭐예요?"

픽업 때 만난 엠마 엄마에게 물었다.

"아, 우리 집 뒤뜰에 오렌지나무 있어요. 매년 이맘때면 너무 많이 열려서 처치 곤란이에요. 학교에 가져가면 아이들이 주스 만들어 먹거든요."

뒤뜰에 오렌지나무라니. 과연 '오렌지 데이'에 뭘 할까 궁금해하던 차에, 마침 그날이 나의 Duty Day였다.


미술 활동이 끝나자, Teacher Becky가 아침에 부모님들이 가져온 오렌지로 가득 찬 커다란 상자를 교실 밖 팬트리(Pantry)에 내려놓으며 외쳤다.

"Okay everyone, it's Orange Day! Let's make our own orange juice!"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오렌지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오늘의 활동은 바로 '나만의 오렌지 주스 만들기'. 아이들은 고사리손으로 플라스틱 칼을 잡고 오렌지를 반으로 자르고, 낡은 수동 압착기에 올려놓고 온 힘을 다해 꾹 눌렀다.

"엄마, 물 나와!"

엘리가 신기한 듯 소리쳤다. 컵에 노란 과즙이 한 방울 두 방울 채워지는 모습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10분을 씨름해서 겨우 반 컵. 직접 짠 주스를 한 모금 마신 엘리의 표정.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주스였을 것이다.

"More! More juice!"

엘리가 외쳤지만, 이미 오렌지는 다 짜낸 후였다.

"Next time, sweetie. We can do it at home too!"

Becky 선생님의 말에 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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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풍경은 DPNS 밖에서도 이어졌다. 데이비스에서는 자기가 키운 과일이나 채소를 이웃과 나누는 풍습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산책하다 보면 집 앞 바구니에 오렌지나 레몬을 가득 담아두고 'For Free'라는 팻말을 세워둔 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엘리와 동네를 걷다가 그런 바구니를 또 발견했다. DPNS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는지 엘리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우리 저거 가져가서 오렌지 주스 만들자!"

"그래, 대신 조금만 가져가자."

"왜 하나만?"

"다른 사람들도 가져가야 하니까."


그렇게 가져온 오렌지를 집에서 다시 한번 압착해 주스로 만들어 먹었다. 마트에서 파는 주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선하고 진한 맛. 오렌지 하나로 나오는 주스는 고작 1/4컵이었지만, 엘리는 "내가 만든 거!"라며 자랑스러워했다.

내 손으로 직접 짠 오렌지 주스를 마시게 될 줄이야. DPNS가 아니었다면, 이 작은 도시에 살지 않았다면 결코 해보지 못했을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제야 데이비스 곳곳에서 봤던 풍경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담장 너머로 주렁주렁 매달린 레몬과 오렌지들. UC Davis 캠퍼스에도 곳곳에 오렌지 나무가 있었는데, 학생들이 가끔 따 먹는 모습을 봤던 기억이 났다.

"여기는 정말 오렌지가 흔하네요."

어느 날 DPNS 픽업 시간에 다른 엄마에게 말했더니,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Central Valley 전체가 미국의 과일 바구니예요. 오렌지, 아몬드, 호두... 캘리포니아가 미국 농산물의 거의 절반을 생산한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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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를 직접 짜 먹는 기쁨과 흙탕물 속에서 뒹구는 자유.

DPNS는 엘리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낯설지만 새로운 세상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빨래는 고되고 걱정도 많았지만, 아이의 웃음소리가 모든 것을 보상해주는 그런 날들이었다.


처음엔 "미국까지 와서 왜 이런 고생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이었다면 깨끗한 실내 놀이터에서, 교육적인 프로그램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냈을 텐데.

하지만 진흙 범벅이 되어 돌아온 엘리의 얼굴에서 본 것은 진짜 행복이었다.


미국의 의료 시스템이 불편하다고들 하지만, 덕분에 배운 것도 있다. 아이는 생각보다 강하고, 부모의 과도한 걱정이 오히려 아이를 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 타이레놀 하나로 버티며 면역력을 기르는 것도, 비를 맞으며 노는 것도, 모두 737일의 시간이 우리에게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엄마, 내일도 비 오면 좋겠다!"

잠들기 전 엘리가 말했다.

"왜?"

"물웅덩이에서 또 놀고 싶어!"

한국 엄마들이 들으면 기절할 소리지만,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스에서의 경험들이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었다.


< 캘리포니아 데이비스의 과일 나눔 문화 >
- 뒤뜰 과일나무가 흔함 (오렌지, 레몬, 감, 석류 등)
- 'Free Fruit' 바구니는 동네 곳곳에
- 가져갈 때는 적당량만, 다른 이웃도 생각하기
< 미국 아동복 가격 (2022년 기준) >
- Target/Old Navy: 티셔츠 $5~8, 바지 $10~15 (가끔 세일하면 3장에 $10)
- Carter's: 좋은 품질에 합리적인 가격. 세일 기간 활용하면 더 저렴
- Janie and Jack: 좋은 옷을 입히고 싶을 때 추천. 50%~70% 세일하는 시즌 오프 상품을 노릴 것
- Goodwill 등 중고 매장도 활용 가능
< 미국 비 오는 날 야외 활동 필수품 >
- 방수 재킷과 바지 (레인 수트)
- 장화 (Rain boots)
- 여벌 옷 2~3벌
- 수건과 물티슈
- "There's no bad weather, only bad clothing" 마인드 (제일 중요!)
< 미국 소아 의료 대처법 >
- Children's Tylenol/Motrin 상비 (체중별 용량 확인)
- 온도계는 필수 (귀 체온계 추천)
- Pedialyte 있으면 좋음 (탈수 방지 음료)
- 3일 이상 고열 지속 시 반드시 병원
- Urgent Care는 당일 진료 가능 (비싸지만, ER보다는 저렴)
- 보험 없을 시 CVS Minute Clinic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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