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만4세 엘리의 첫사랑과 이별

카사노바 램지, 그리고 영원할 줄 알았던 우정

by 유지니안

"엄마, 오늘도 램지랑 놀았는데~ 재미있었어!"

3월 어느 날, DPNS에서 돌아온 엘리가 볼이 발그레해진 채로 말했다. 램지? 아, 그 개구쟁이 남자애. 항상 야드에서 제일 큰 소리로 웃고, 제일 많이 움직이며, 다른 아이들을 이끌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램지 좋아! 램지가 나 손도 잡았어."

"그래? 램지가 왜 손을 잡았대?"

"몰라. 그냥 잡았어."

만 4세. '남자'가 뭔지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엘리는 이미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램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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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는 정말 '통통 튀는' 아이였다. 깊고 큰 눈에 장난스러운 미소까지. 약간 나쁜남자 스타일이랄까?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자기가 대장이어야 하고, 여자아이들한테는 은근히 잘 보이려고 하는 그런 타입.

만 5세짜리가 벌써부터 그런 기질을 보이다니, 앞으로가 무서운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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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Duty Day. 나는 엘리와 램지의 '관계'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Ellie! Come here!"

램지가 샌드박스에서 엘리를 불렀다. 엘리는 하던 놀이를 멈추고 후다닥 램지에게 달려갔다.

"Let's make a castle together!"

둘은 나란히 앉아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다. 램지가 큰 틀을 만들면, 엘리가 장식을 하고. 다른 아이가 끼어들려고 하면 램지가 막아섰다.

"This is only for me and Ellie!"

엘리는 그런 램지가 좋은 모양이었다. 스낵 타임에도 램지 옆에 앉고, 서클 타임에도 램지 옆자리를 차지했다.


집에 와서도 "램지가 이랬어, 램지가 저랬어" 하며 램지 이야기만 했다.

"여보, 우리 딸이 벌써 남자친구가 생겼대."

"뭐? 만 4살짜리가 무슨 남자친구야."

남편도 어이없어했지만, 엘리의 '램지 사랑'은 진심이었다.

그렇게 봄 내내 램지와 엘리는 DPNS의 공식 커플(?)처럼 지냈다. Teacher Becky도 웃으며 말했다.

"They're like two peas in a pod!"

(꼬투리 안의 두 콩처럼 - 단짝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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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3개월의 긴 방학. 램지네는 가족 여행을 떠났고, 우리도 각자의 여름을 보냈다.

9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엘리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오늘 램지 만나! 램지한테 이거 보여줄 거야!"

여름 동안 그린 그림을 가방에 넣는 엘리. 하지만 DPNS에 도착해서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램지가 다른 여자아이와 손을 잡고 있었다. 아디나. 안경을 쓴 조용한 인도계 여자아이였다. 작년에는 항상 혼자 책만 읽던 아이였는데...

"Adina, wait for me!"

램지가 아디나를 부르며 뛰어갔다. 여름방학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디나는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램지와 함께 야드를 뛰어다니고, 깔깔대며 웃고, 심지어 램지의 팔짱까지 끼고 다녔다.



엘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엄마... 램지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만 4세 아이에게 '실연'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램지는 이제 아디나랑 친한가 보네. 엘리도 다른 친구들이랑 놀자."

"싫어! 램지랑 놀 거야!"

하지만 램지는 이제 엘리를 예전처럼 대하지 않았다. 엘리가 다가가면 "I'm playing with Adina now"라며 거절했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내내 엘리는 말이 없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잠들기 전에도.

"엄마, 램지가 나 안 좋아해?"

"아니야. 램지는 그냥... 새로운 친구가 생긴 거야."

만 4세의 첫 실연. 어른들이 보기엔 귀여운 해프닝이지만, 엘리에게는 진짜 아픔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엘리에게는 루시가 있었다. 루시는 엘리보다 두 살 많은 6세. DPNS에서 가장 큰 언니 중 하나였다.

엘리가 처음 DPNS에 왔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영어도 서툴고, 낯선 환경에 완전히 얼어있던 엘리. 그때 처음으로 다가온 아이가 루시였다.

"Hi! You're new? I'm Lucy! Wanna play?"

갈색 곱슬머리에 초콜릿색 눈을 가진 루시.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엘리를 마치 친동생처럼 챙겼다.

"Ellie, come! I'll show you something cool!"

루시는 항상 엘리의 손을 잡고 DPNS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비밀 기지라며 덤불 뒤를 보여주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그네 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점심시간에는 같은 그룹이 아니어도 같이 먹으려고 찾아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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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네 가족과 우리 가족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루시 아빠는 UC Davis Law School을 졸업하고 Meta에서 사내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Your husband is at King Hall? Oh, I graduated there in 2015!"

픽업 시간에 만난 마크와 남편은 금세 친해졌다. 같은 학교, 같은 교수님들 이야기를 하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혹시 Amar 교수님 아직도 계세요? 예전에 형사소송법 배우면서 진짜 힘들었는데."

"Amar 교수님이요? 예전에 UCD에 계시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다음 학기에 교수님한테 Remedies 들어야 하는데 어떻하죠..."

두 사람은 한국과 미국의 법 체계 차이부터 시작해서, 당시 가장 큰 이슈였던 샌프란시스코 체사 부딘(Chesa Boudin) 검사장의 정책까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950달러 미만 절도를 경범죄로 바꾸니까, 샌프란시스코가 좀도둑들 천국이 됐어요."

"맞아요. 교도소가 꽉 차서 그랬다는데 오히려 샌프란시스코가 교도소가 되어버렸어요."


9월의 어느 주말, 루시네 가족이 우리를 데이비스 센트럴 파크 피크닉에 초대했다.

"It's Picnic in the Park! You have to come!"

데이비스 파머스 마켓 주관으로 매주 수요일 저녁에 Central Park에서 피크닉 행사가 열린다고 했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는 지역 밴드의 라이브 음악 공연이 있다고. 각종 공연과 먹거리가 가득한 축제였다.

엘리는 루시와 함께 뛰어다니며 축제를 즐겼다. 노래를 부르는 밴드 앞까지 나가서 춤을 추기도 하고, 푸드트럭에서 솜사탕을 먹기도 했다.

두 아이가 손을 잡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루시 엄마가 말했다.

"They're like real sisters, aren't they?"

"정말요. 엘리가 루시를 너무 좋아해요."

"Lucy talks about Ellie all the time too. She never had a little sister, so..."

문화는 달라도 아이들의 우정 덕분에 가까워진 두 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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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Lucy is graduating from DPNS this year."

루시가 이번 학기를 끝으로 DPNS를 졸업한다는 것이다. 9월부터는 킨더가든에 들어간다고.

"엘리야, 루시가 이제 큰 학교에 간대."

"그러면 루시 못 봐? 아니야! 루시 볼거야."

아무리 설명해도 엘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루시와 엘리가 지금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루시네 가족과는 그 후로 몇 번 만나지 못했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일정, 새로운 친구들. 각자의 삶이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루시가 떠난 후, 엘리는 한동안 DPNS에 가기 싫어했다. 램지에 이어 루시까지. 만 4세의 이별은 어른들이 보기엔 작은 일이지만, 엘리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엘리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새로 DPNS에 들어온 애비게일과 마야와 함께 삼총사를 찍기도 하고, 어느 날은 맥스와 함께 곤충을 관찰하곤 했다. 실내에 있고 싶을 때는 애밀리와 그림을 그리고, 올리와 함께 소꿉놀이를 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 외에도 울프, 가브리엘, 아이작, 타쿤다, 일라이자, 포레스트, 마리아, 세이건, 브루클린, 보디, 사헤지, 애비, 새라... 다양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면서 이별의 아픔은 서서히 희석되었다.


어느 날 Teacher Becky가 말했다.

"Ellie is becoming more independent. She's not following others anymore, she's making her own choices."

루시와 램지를 통해 엘리는 관계의 시작과 끝을 배웠다. 사람은 만나고 헤어진다는 것,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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