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뜻밖의 겨울

집 구경으로 시작된 겨울, 뜻밖의 친구들이 생겼다

by 유지니안

Allison과 Lucia

집 구경이 나의 작은 일탈이 되어가던 11월 말, 또 다른 Open House를 찾아 헤매다가 단독주택으로 둘러싸여 있는 Whaleback Playground를 발견했다. 우리 아파트에서 큰길을 건너야 하고, 데이비스 서쪽 끝에 있어서 잘 가지 않던 곳이었다.

"엄마, 놀이터다!"

엘리가 신나서 뛰어갔다. 11월 말의 쌀쌀한 날씨에도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Hola, amiga!"

갑자기 스페인어가 들렸다. 엘리보다 조금 작아 보이는 갈색머리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그 아이가 바로 루시아였다. 엘리보다 한 살 어린 세 살이었다.


"Your daughter is so cute! What's her name?"

따뜻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앨리슨이었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참 편안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루시아에게 계속 스페인어로 말을 거는 모습이었다. 루시아는 스페인어로 듣고 영어로 대답했다. 꼭 엘리와 나의 모습 같았다.


이중언어 가정이라는 공통점 때문일까, 우리는 금세 가까워질 수 있었다.

UC Davis 캠퍼스 커플인 앨리슨은, 샌프란시스코의 제약회사에서 일하다가 결혼 후 데이비스로 돌아와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 모습이 왠지 남편 유학을 따라와 일을 쉬고 있는 나와 겹쳐 보였다.


며칠 후, 앨리슨이 집으로 초대했다.

"Nothing fancy, just a playdate for the girls."

스톤게이트 호수(무려 1969년에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근처의 아담한 단독주택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바로 바닥에 카펫이 없던 것. 미국 집들은 대부분 카펫이 깔려 있는데, 거실부터 복도까지 모두 나무 바닥이었다.

"우리가 이 집 샀을 때 첫 번째로 한 일이에요. 카펫은 아무래도 비위생적이잖아요."

앨리슨의 설명이 이어졌다. 특히 아이들이 있으면 더 그렇고,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카펫을 없애고 있다고.


엘리와 루시아가 인형놀이를 하는 사이, 나와 앨리슨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일을 그만둔 후의 정체성 혼란, 모국어 교육의 고민... 비슷한 고민을 나누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앨리슨은 제시와 달랐다. 제시는 항상 무언가를 가르치려 하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앨리슨은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공감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Sara

어느 날, 매주 한-미 음식 교류 중인 Katy 할머니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아마 나의 공부에 대한 열망이 느껴져서 였을까..?

" Davis나 Woodland 시에서 운영하는 영어 교육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한번 찾아봐!"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니. 학업을 포기한 후 느끼던 지적 갈증, 새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다음 날, 남편과 엘리를 데리고 Davis International House를 찾아갔다. 오후 4시쯤이었는데 대부분 퇴근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낯선 이방인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직원을 찾았다.

"상담하러 오셨나요? 아쉽지만 오늘은 시간이 끝났어요. 여기 팜플렛이 있으니, 집에 가져가서 한번 보세요."

가방을 멘 직원이 우리를 내보내듯 안내했다. 어렵사리 찾아왔는데 허탈했다.


집에 와서 팜플렛을 살펴보니 여러 프로그램이 있었다. Drop-in 형식의 영어 수업부터 현지인과의 1:1 대화 매칭까지. 우선 영어 수업을 들을 수 있는지 전화로 확인했다. 자체 영어 시험을 봐야 한다고 했다.


Davis International House 프로그램
- ESL (English as Second Language) 클래스: 레벨별 수업
- Conversation Partner Program: 현지인과 1:1 매칭
- Cultural Exchange Events: 월별 문화 교류 행사


남편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 오후에 시험을 보러 갔다. 그런데 결과가 황당했다.

"죄송하지만, 영어 실력이 너무 좋으셔서 우리 수업 대상이 아니에요."

영어를 '잘해서' 영어 수업을 들을 수 없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의아했지만, 그렇다면 나와 맞는 프로그램이 무엇이 있을지 상담했다. 그 결과 현지인과의 1:1 대화 프로그램에 신청하게 되었다. 내향적인 나에게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큰 부담이었지만, 이대로 계속 정체되어 있다가는 말라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매칭된 사람이 바로 새라였다. 미국에서의 세 번째 친구.


첫 만남은 Mishka's Cafe였다. 데이비스에서 태어나 UCD에서 남편을 만나고, 페루에서 지내다가 반년 전에 다시 데이비스로 이사 왔다고. 자녀가 두 명 있는 만큼 아무래도 안전하고 살기 좋은 데이비스로 선택한 것 같았다.

"오! 우리도 West Davis 쪽에 살아. 내 집은 Village Homes 근처에 있어. 어딘지 알아?"

놀랐다. 내가 집 구경을 다니며 넘겨다보던 그 아름다운 단독주택 단지에 실제로 아는 사람이 산다니.


새라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 지적 호기심이 넘쳤고, 대화 주제가 무궁무진했다. 정치, 경제, 문학, 예술, 여성... 매주 만나 산책하며 나누는 이야기들이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특히 'Outliers'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뭔가 소름이 돋았다.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녹이며 책에 대해서 말할때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동안 충족되지 못했던 지적 갈증이 조금씩 해소되어서 일까.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새라의 한국 문화, 특히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이었다.

나 역시 건강하고 바른 먹거리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서 음식에 대한 주제 역시 우리에게 많은 공감대를 형성해 주었다. 특히 UC Davis Student Farm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은 새라는 그곳에서 기른 유기농, 그리고 신선한 채소들을 종종 가져다주었다. 배추, 무, 고추, 콩, 마늘...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싱싱한 채소들이었다.


그렇게 12월은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흘러갔다. 집 구경으로 시작된 작은 일탈이 뜻밖의 인연들로 이어졌다. 포기의 상실감, 겨울방학 여행을 가지 못하는 아쉬움... 그런 무거운 감정들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어도, 일상의 작은 만남과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데이비스의 겨울은 여전히 춥고 비가 많이 왔지만, 내 마음속엔 조금씩 온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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