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 운명은 정해졌는가, 만들어지는가
카페의 유리창 너머엔
크기는 크지만 가벼워 보이는
함박눈이 내렸다.
진우는 카운터에서 오래된
타로 카드 세트를 꺼내 놓았다.
누가 요청한 것도 아닌데,
손에 쥐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첫 번째 손님은 에픽테토스.
그는 올리브색 튜닉을 입고 있었고,
무릎을 살짝 절었다.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지만
그래서 어울렸다.
목소리는 낮았고,
문장 끝마다 ‘침묵’을 남겼다.
“운명이란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인식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하지만,
태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진우가 물었다.
“그럼 우리는 자유로운 가요?”
“자유는 내 외부가 아니라,
내 반응 속에 있습니다.”
그의 말은 마치 묵주처럼 반복되었다.
두 번째 손님은 칼 융.
트위드 재킷에 나무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고,
눈동자는 마치 타인의 꿈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나는 인간의 삶이 무의식과 원형의 구조에 따라
반복된다고 믿습니다.
그걸 운명이라 부르지요.”
라빈이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그럼 우린,
무의식에 이끌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가요?”
“그렇지요,” 융이 말했다.
“우리는 운명을 의식할 때까지 반복합니다.
깨닫지 못한 패턴은,
외부 사건처럼 다가오죠.”
그 순간, 마지막 손님이 문을 열었다.
장 폴 사르트르.
검정 셔츠와 낡은 코트,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믿지 않되
모든 것에 반응하는 사람 같았다.
“운명? 그건 책임을 회피하는 이름일 뿐입니다.
우리는 본질 없이 던져졌고,
존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에픽테토스가 낮게 웃었다.
“그대는 신을 부정하는가?”
“나는 신이 없음을 전제로,
자유를 긍정합니다.”
사르트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는 선택하고,
선택에 의해 정의됩니다.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만든 나’입니다.”
융은 잔을 비우며 말했다.
“선택조차 반복되는 심리의 결과일 수 있어요.”
사르트르가 쏘아보듯 말했다.
“그건 편리한 결정론이지,
인간에 대한 존엄은 아니오.”
에픽테토스가 조용히 정리했다.
“어쩌면 진실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것일지도요.”
라빈이 옆 테이블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하는 지혜가 삶이겠죠.”
진우는 노트에 적었다.
‘운명이 있든 없든,
우리는 오늘의 선택으로 내일을 살아간다.’
눈이 잔뜩 섞인 바람이 불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카페의 나무창틀이 유난히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