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통해 '인도의 사상과 명상'이라는 주제로 27번의 글을 올렸다. 인류 지혜의 보고라 불리는 베다의 찬가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근본 원리를 파고든 우파니샤드, 그리고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일러준 바가바드기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먼 길을 돌아왔다.
인도가 믿는 수억 명의 신(神) 들을 살펴보며 그것이 결국 '하나의 근원'이 보여주는 무한한 변주일 뿐임을 확인했고, 석가모니와 마하비라 같은 거대한 성자들로부터 샹카라, 라마나 마하리쉬에 이르는 지혜의 거인들을 만났다. 이제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으며, 인도의 사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마지막 화두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릭베다 제1권 164장 46절에 등장하는 "에캄 사트 비프라 바후다 바단티(진리는 하나이나, 현자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는 인도 철학의 정수다.
인도 사상을 관통하는 가장 거대한 줄기는 "진리는 하나이나, 현자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는 릭베다(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인 4대 베다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헌)의 선언이다. 27회에 걸쳐 우리가 살펴본 많은 성자와 종파들은 겉으로 보기엔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듯했다.
철저한 고행을 강조한 자이나교의 마하비라와 중도(中道)를 설파한 석가모니, 지식의 칼로 무지를 베어낸 샹카라와 가슴 뜨거운 헌신을 노래한 차이탄야, 이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에 깃든 신성(아트만)을 발견하고, 그 신성이 우주의 근원(브라만)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합일'의 상태를 향하고 있었다.
현대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이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분리될 수 없음을 증명하듯, 고대 인도의 현자들은 수천 년 전 이미 '나와 우주는 본래 하나'라는 불이(不二, 아드바이타)의 진리를 보았다. 우리가 공부한 수많은 신과 성자들은 결국 이 하나의 거대한 바다로 흐르는 서로 다른 이름의 강물들이었던 셈이다.
이번 연재에서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라마나 마하리쉬일 것이다. 그는 복잡한 교리나 경전의 해석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우리 앞에 던졌다.
인도의 사상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고 믿고 있는 가짜 자아(에고), 즉 이름과 직업, 나이와 사회적 지위라는 허울을 벗겨내고 그 안에 숨겨진 순수 의식을 찾아가는 수행의 과정이다. 샹카라가 말한 '마야(환상)'의 막을 걷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경쟁이 환상임을 깨닫고 본연의 평온에 이르게 된다.
40년 넘게 영성을 공부하며 내가 얻은 결론 또한 다르지 않다. 신은 멀리 하늘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감 그 자체이며, 내 곁에서 숨 쉬는 타인들의 눈동자 속에 깃든 빛이다.
인도사상을 서구사상과 비교해 보기로 한다.
한 예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을 들어보자.
사르트르는 세계 1, 2차 대전의 폐허위에서 신은 없으며, 우주는 우연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사르트르의 사상은 유럽 지성사가 겪은 가장 처참한 비극의 배경이 바탕이 되었다.
홀로코스트와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동안 신은 침묵했다. 사르트르를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은 "이런 비극을 방치하는 신이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전쟁은 인간이 얼마나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어떤 고귀한 운명도, 설계도도 없이 폭격 한 번에 사라지는 목숨들을 보며, 사르트르는 우주가 필연이 아닌 '우연'의 산물임을 확신했다.
유럽의 개인주의 전통은 사르트르를 통해 그 정점에 도달한다. 전통적 공동체와 종교적 가치가 붕괴하자, 남은 것은 오직 '나'라는 개별적 의식뿐이었다. 사르트르에게 가치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통해 창조하는 것이어야 했다. 기댈 곳 없는 개인이 모든 가치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은 축복이라기보다 고통에 가까웠다. 이것이 '절망적 시대'와 '개인주의'가 결합하여 탄생한 실존적 불안의 본체다.
사르트르는 '나'와 '세계', '나'와 '타자'를 철저히 분리된 상태로 보았기에 그 자유가 고독하고 절망적이었다. 이것은 또한 서구의 절망이었다. 반면 인도의 사상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이 현상은 마야(환상)일 뿐이며, 그 기저의 브라만은 결코 훼손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인간은 '길을 잃은 이방인'이었지만, 범아일여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신이 주인임을 잠시 잊은 왕'인 셈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그러한 절망적 시대와 서구의 개인주의가 결합한 그 당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상이었다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위해 '실존은 본질을 선행한다' 라고 말했다. 수저는 수저의 역할 을 위해 세상에 나왔다. 그것이 수저의 본질이다.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졌다.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것이 실존이다.
사르트르는 신이 죽은 폐허 위에서, 미리 정해진 설계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을 보았다. 그는 의지할 곳도, 기댈 근거도 없이 오직 자신의 선택만으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인간의 가혹한 운명을 ‘자유라는 형벌’이라 불렀으며, 그 절대적 고립 속에서 인간을 영원한 ‘우주의 이방인’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인도의 유구한 지혜는 그 텅 빈 자아의 공간을 절망이 아닌 무한한 잠재성으로 읽어낸다. 그것은 개별적 자아라는 좁은 울타리를 부수고, 내면의 심연(아트만)이 곧 우주의 거대한 불꽃(브라흐만)과 한 몸임을 깨닫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선언이다.
우리는 무의미한 허공을 떠도는 고립된 파편이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일렁이는 파도이자 바다 그 자체이며, 스스로가 곧 역사의 목적이자 신성한 주권자임을 일깨워준다. 사르트르가 본 '무(無)'가 결핍의 구멍이었다면, 인도의 지혜가 본 '무(無)'는 만물을 품은 '충만한 진공'이었던 셈이다.
이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세 가지 지점에서 짚어보자.
1. 사르트르에게 자유는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는 형벌이지만, 인도 사상에서 자유는 '모크샤(해탈)', 즉 나를 가두던 에고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축복이다. 사르트르가 느낀 '불안'을 인도 사상은 '경외'로 치환한다.
2. 사르트르의 인간은 우주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질적 존재*다. 반면, 범아일여는 인간이 우주 그 자체라고 말한다. 내가 우주의 주인이기에, 내가 겪는 고통과 역사의 비극조차도 거대한 유희의 일부로 포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3. 사르트르의 의식은 비어 있기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워야 하는 '갈증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 빈 공간은 양자역학의 진공 에너지처럼 모든 것이 태어날 수 있는 '무한한 양자장'이다.
인도사상은 우리를 풍족하게 우주와 함께 할 수 있게 해준다.
연재 후반부에서 다룬 현대의 명상가들은 고대의 지혜를 현대인의 언어로 번역해 주었다. 타고르가 시(詩)를 통해 우주적 사랑을 노래하고, 현대의 스승들이 일상 속의 알아차림을 강조한 것은 인도의 사상이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임을 보여준다.
이제 연재를 마치며 글을 닫는다. 나 역시 많은 책을 읽고 진리를 찾아 구도의 과정을 보냈지만, 결국 남는 것은 아주 단순한 진실들이다.
인도의 사상이 우리에게 준 선물은 '도피'가 아니라 '직면'이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주체가 누구인지 응시하는 것,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곧 나의 확장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브라만이라는 거대한 바다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고, 우리는 그 바다 위를 떠다니는 물방울이자, 바다 그 자체다.
그동안 이 연재를 함께 읽어준 독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인도의 성자들이 그러했듯,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이라는 전장에서 당당한 전사 아르주나가 되어, 동시에 평화로운 명상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 당신이 숨 쉬는 그 순간, 당신이 '나'라고 느끼는 그 지점에 우주의 모든 지혜가 이미 깃들어 있다.
나마스테(Namaste : 내 안의 신성이 당신 안의 신성에게 경배를 보낸다)!
1. 연재 후기
처음 이 연재를 시작할 때, 내 마음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과연 인도의 그 방대한 철학적 깊이를 브런치라는 현대적 공간에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오랫동안 진리와 영성의 길을 걸어오며 수많은 경전을 들추고 성자들의 발자취를 쫓았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수행이었다. 글을 쓰는 4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다시금 초심자로 돌아가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읽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문장들이 매일 아침 직장으로 향하는 4시간의 짧은 여정 속에서, 그리고 퇴근 후 고요한 책상 위에서 새롭게 다가왔다.
나의 글은 전문적인 학술서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붙잡고 살아온 한 구도자의 고백에 가깝다. 때로는 막막한 양자역학의 개념을 빌려오기도 했고, 때로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뜨거웠던 기억을 되새기며 인간의 존엄을 묻기도 했다. 내 스스로의 공부와 그 내용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연재를 썼다.
이 글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단 하나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는 결코 분리된 존재가 아니며, 당신 안에 이미 우주의 모든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연재는 여기서 멈추지만, 나의 사유는 이 글을 읽어준 독자들의 삶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계속 흐를 것이라 믿는다.
2. 독자들과의 질의응답 (Q&A)
연재 기간 중 댓글과 메시지로 받았던 주요 질문들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Q1. 왜 하필 '인도'의 사상인가? 서양 철학이나 다른 동양 철학도 있지 않은가?
A: 나는 대표적인 세계의 8대 도맥을 공부하면서 인도에 특히 관심이 끌렸다. 인도는 영성의 '원형'을 간직한 곳이다. 서구의 합리성이 외부 세계를 정복하려 할 때, 인도는 철저히 내면 세계의 탐험에 집중했다. 우리가 겪는 실존적 불안의 해답이 외부가 아닌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가장 진솔하고도 논리적으로 증명한 곳이 바로 인도다.
Q2. 일상생활이 너무 바쁘다. 명상을 꼭 따로 시간을 내서 해야 하나?
A: 명상은 눈을 감고 앉아 있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말했듯, 진정한 명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알아차림을 놓지 않는 것이다. 설거지를 할 때, 지하철을 타고 갈 때, 혹은 누군가와 대화할 때 나의 의식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 그것이 가장 강력한 명상이다. 나의 명상과 묵상도 그렇다.
Q3. 수많은 성자 중 딱 한 명의 가르침만 골라야 한다면 누구인가?
A: 단연 샹카라다. 그의 주장은 선명하고 명쾌하다. "세상은 환상(마야)이고, 오직 브라만(브라만)만이 실재하며, 개별 자아는 곧 브라만이다"라는 그의 선언은 인류 지성사의 정점이다. 그는 이 모든 그의 지상적 사명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32세의 젊은 나이에 히말라야의 성지 케다르나트에 도착하여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고 설산의 사원 뒤편으로 홀로 걸어 들어갔고, 그 이후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지상의 목적을 다했으니 나는 다음 장소로 간다'라고 말했던 것일까. 그는 마치 인도의 아이돌 성자 같다. 어쨌든 그의 사상은 단순, 명쾌하고 또한 분명하다. 그의 사상은 군더더기가 없고 모호한 것이 없다. 그를 읽으면 머리가 맑아진다.
Q4. 앞으로의 집필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A: 현재 브런치에서 연재 중인 <경쟁은 환상이다>와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시리즈를 이어갈 예정이다. 또한, 80년대 신앙적 해결의 길과 현실적 해결의 길, 광주의 아픔과 시대정신을 담은 소설 <빨강>의 집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인도의 지혜뿐 아니라 한국 영성의 지혜가 어떻게 사회적 자비로 발현되는지를 글로 증명해 보고 싶다.
그리고 이 연재 글들을 끝내고 새로운 연재로 본격적인, 본격적으로 말하고 싶은, 내가 공부한 영성의 내용을 풀어놓고 싶다. 새로운 소설도 구상 중이고 '커피 같은 시'도 간간히 녹여내고 싶다.
마무리 인사
오랫동안 동서양 경전과, 수백 권 다양한 정신세계의 책들과 묵상의 시간을 보냈고, 영성의 세계에서 최근 잠시나마 이 글들이 써졌다. 최근의 AI도 객관적 자료, 역사적 사실등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도움에도 불구하고 기획과 아이디어, 내가 주장하고 싶은 논리의 결론은 앞으로도 나 스스로 마무리할 것이다.
글은 작가를 떠나 독자의 눈에 닿는 순간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27회에 걸친 여정 동안 이름도 모를 동행자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이제 나는 다시 붓을 씻고, 다음 산맥을 넘을 준비를 한다.
우리들의 삶이 곧 하나의 경전임을 잊지 말자.
2026년 2월, '지혜의 길 仙雲서재'에서.
[작가의 한마디] 그동안 '인도의 사상과 명상' 시리즈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연재는 여기서 멈추지만, 저의 글쓰기와 진리 탐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연재하고 있는 시리즈에 이어 조만간 새로운 주제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