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카라차리아 사원
샹카라의 등장은 인도 사상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인도 사상의 역사에서 히말라야와 같은 봉우리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아디 샹카라(Adi Shankara, 788?~820?)다. 그는 불과 32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분열되어 있던 인도의 철학을 통합하고 불교와 자이나교에 밀려 쇠퇴하던 힌두교(베단타 철학)를 완벽하게 부흥시킨 천재 사상가이자 영적 스승이다. 오늘날 우리가 '인도 철학'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가장 핵심적인 사상, 즉 '아드바이타 베단타(불이일원론)'를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그다.
샹카라는 서기 788년경, 인도 남부 케랄라 주의 칼라디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시바구루와 어머니 아리얌바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시바 신에게 기도를 올렸고, 그 응답으로 태어난 아이가 샹카라라고 전해진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범상치 않은 천재성을 보였다. 3세 때 이미 문자를 해독했고, 8세가 되기 전에 4베다를 모두 암송하고 통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그는 일찍이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진리에 대한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 수행자(산야신)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외아들을 의지하며 살던 어머니는 결사반대했다.
[에피소드: 악어와 출가의 허락] 여기서 샹카라의 생애 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등장한다. 어느 날, 샹카라가 집 근처 푸르나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거대한 악어가 나타나 그의 다리를 물고 강으로 끌고 들어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샹카라는 강가에 있는 어머니에게 외쳤다. "어머니! 악어가 저를 삼키려 합니다. 제 육신은 여기서 죽겠지만, 제가 마지막 순간에라도 출가하여 수행자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평안히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 어머니는 울부짖으며 출가를 허락했다. 그 순간, 기적처럼 악어가 입을 벌려 샹카라를 놓아주었다. '죽음에서 다시 태어난' 샹카라는 약속대로 어머니를 뒤로하고 진리를 찾아 유행의 길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8세였다.
고향을 떠난 소년 샹카라는 나르마다 강가에서 스승 고빈다 바가밧파다를 만난다. 스승이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어린 샹카라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불도 아니고, 땅도 아니며, 바람도 아니다. 나는 이 모든 형상 너머에 있는 순수한 의식(Atman)이다." 이 대답을 들은 스승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샹카라 사상의 핵심은 '아드바이타(Advaita)', 즉 '둘이 아니다(Non-dualism)'다. 그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만이 유일한 진리이며, 우리가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현상계는 마야(Maya, 환영)라고 설파했다.
1) 핵심 명제: 범아일여(梵我一如) 그의 사상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브라흐만만이 진실이고, 세계는 거짓(환영)이다. 개별 영혼은 브라흐만과 다르지 않다."
이는 개인의 영혼인 아트만이 우주의 본질인 브라흐만과 결코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파도가 바다와 다르지 않듯, 우리 내면의 참나(True Self)는 곧 신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2) 마야와 아비디아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인 세상을 여럿으로 나누어 보고 고통받는가? 샹카라는 이를 마야와 아비디아로 설명한다.
마야(Maya): 브라흐만이 세상을 창조(투사)할 때 사용하는 신비한 힘이다. 마술사가 마술을 부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듯, 절대적인 하나(One)를 다양한 현상세계(Many)로 보이게 하는 우주적 환영의 힘이다. 여기에는 진리를 가리는 힘(은폐)과 가짜 형상을 만들어내는 힘(투사)이 있다.
아비디아(Avidya): 이것은 개인의 내면에 있는 '무지'다. 이 무지 때문에 우리는 육체나 마음을 '나'라고 착각하고, 타인과 나를 분리된 존재로 인식한다.
3) 밧줄과 뱀의 비유 샹카라는 우리의 착각을 '밧줄과 뱀'의 비유로 설명한다. 어두운 길에서 밧줄을 보고 뱀이라 착각하여 공포에 떨지만, 불을 비추면 그것은 단지 밧줄이었음을 알게 된다. 뱀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무지가 밧줄 위에 뱀이라는 형상을 '덧씌운(Adhyasa)' 것이다. 깨달음이란 뱀(세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본래 밧줄(브라흐만)이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샹카라 사상의 핵심은 '아드바이타', 즉 '둘이 아니다'다. 그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Brahman)만이 유일한 진리이며, 우리가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현상계는 마야(환영)라고 설파했다.
샹카라는 16세가 되었을 때 이미 모든 경전의 주석서를 완성했다. 그는 인도의 3대 경전인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 <브라흐마 수트라>에 대한 방대한 주석을 썼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베단타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권위를 가진다.
또한 철학서인 <비베카추다마니(분별의 보석)>와 아름다운 찬가인 <바자 고빈담> 등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특히 <바자 고빈담>에서는 "문법 지식을 자랑하지 말고 신을 찬양하라"며 지성뿐만 아니라 헌신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저술에만 머물지 않고 인도 전역을 돌며 당시의 수많은 학파와 논쟁을 벌였다.
[<비베카추다마니> 중에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 가운데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 그러나 그 무엇보다 해탈을 향한 간절한 열망을 갖는 것은 수백만 생의 공덕이 쌓여야만 가능한 기적이다."
"곡식을 얻으려는 자가 겉껍질만 털어내고 알곡을 버린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경전을 읽으면서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독서는 헛된 수고일 뿐이다."
[<바자 고빈담> 중에서]
어느 날 샹카라는 죽음을 앞두고 문법 규칙을 암기하는 노학자를 보고 탄식하며 노래했다.
"고빈다(신)를 찬양하라. 어리석은 자여!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 문법 규칙 암기가 너를 구해주지 못하리라." "연꽃잎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물방울처럼, 인간의 생명 또한 찰나에 불과하다."
샹카라는 저술에만 머물지 않고 인도 전역을 돌며 당시의 수많은 학파와 논쟁을 벌였다.
[만다나 미슈라와의 논쟁] 당시 최고의 재가 학자였던 만다나 미슈라와의 논쟁은 전설적이다. 심판은 미슈라의 아내 우바야 바라티가 맡았으며, 목에 건 화환이 먼저 시드는 쪽이 패배하기로 했다(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온도가 올라 꽃이 시들기 때문). 수일간의 격론 끝에 미슈라의 꽃이 시들었고, 그는 샹카라의 제자(수레슈바라)가 되었다.
또한 샹카라는 인도의 영적 통일을 위해 동서남북 네 곳의 성지에 수도원인 마타(Matha)를 세웠다. 그는 조직이라는 방편을 충분히 활용했다(동쪽 푸리, 서쪽 드와르카, 남쪽 슈링게리, 북쪽 조시마스).
동쪽: 푸리의 고바르다나 마타
서쪽: 드와르카의 샤라다 마타
남쪽: 슈링게리의 샤라다 피탐
북쪽: 조시마스의 조티르 마타
이 네 곳의 수도원은 1,200년이 지난 지금도 샹카라의 법통을 이어받은 지도자(샹카라차리아)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1) 불교의 쇠퇴와 힌두교의 부흥 당시 인도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력이 강했고, 정통 베다 사상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샹카라는 불교의 정교한 논리학을 흡수하여 불교를 비판하고 베다의 권위를 다시 세웠다. 일부 비판자들은 그를 '가면 쓴 불교도'라고 불렀을 정도로, 그는 불교의 장점을 취해 힌두교 내부로 녹여냈다. 이로 인해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고 힌두교에 흡수되는 결과를 낳았다.
2) 철학적 표준의 정립 샹카라 이후 등장한 인도의 모든 철학은 샹카라에 대한 '반작용'이거나 '재해석'이었다. 라마누자의 '한정 불이론'이나 마드바의 '이원론' 등 후대 사상들은 모두 샹카라의 불이일원론을 비판하거나 수정하며 발전했다. 즉, 샹카라는 인도 철학의 기준점이 되었다.
3) 스마르타 전통의 확립 그는 시바, 비슈누, 샥티, 가네샤, 수리야, 쿠마라 등 여섯 신을 모두 브라흐만의 다른 모습으로 인정하고 숭배하는 '샨마타' 시스템을 정립했다. 이를 통해 종파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힌두교의 포용적 전통을 확립했다.
샹카라는 천하를 호령하는 스승이었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한 명의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수행자의 계율을 어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친척들이 "수행자가 장례를 치르는 법은 없다"라며 돕기를 거부하자, 그는 자신의 영적인 힘으로 마른 바나나 줄기에 불을 붙여 어머니를 화장했다. 이는 율법보다 진정한 효(孝)와 인간애가 우선함을 보여준 일화다.
어머니를 보낸 후, 샹카라는 다시 히말라야로 향했다. 그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히말라야의 성지 케다르나트에 도착했다.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남긴 그는 설산의 사원 뒤편으로 홀로 걸어 들어갔고, 그 이후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채로 법계와 하나가 되는 비데하 무크티(육신 없는 해탈)에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진리는 둘이 아니다"라는 사자후는 1,200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의 정신을 깨우고 있다.
아디 샹카라는 3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인도를 세 번이나 도보로 일주하며, 꺼져가던 영성의 불씨를 되살렸다. 그가 정립한 불이일원론은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신과 인간이 다르지 않다"는 거대한 통합의 메시지다. 현대의 양자역학이 물질과 의식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지금, 1,200년 전 샹카라가 외쳤던 "보이는 세계는 환영이며, 본질은 하나"라는 가르침은 더욱 선명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진리는 둘이 아니다(Advaita)"라는 사자후는 여전히 인류의 정신을 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