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
소송에서 소통하는 방법은 서면이다. 모든 것을 글로 써서 법원에 제출하고 재판관 원고 피고가 모두 열람할 수 있다. 변론기일에는 형식적으로 몇 마디 물어본다. 변론기일에 아무리 말을 잘해도 소용없다. 서면으로 내지 않으면 재판부에게 의사전달이 안된 것으로 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면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변호사들이 쓰는 것이고 판사가 읽으니 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소액 사건에서는 사실관계만 잘 서술해도 무리가 없는 것 같다.
사건이 복잡하고 법리를 적용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법적 지식이 있는 전문가가 써야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어릴 때 글을 곧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다. 학교 백일장에 나가면 상도 타고 그랬다. 그렇지만 생업에 바빠지면서 글을 쓸 기회가 없었다. 하는 일도 글을 쓸 일이 많지 않은 직업군이다. 학교 졸업하고는 글쓰기는 잊고 살았다. 소송이 발생하고 어쩌다 보니 변호사에게도 글로 사건을 전달해야 하고 나중에는 나 혼자서도 서면을 쓰게 되었다. 여러 차례 하다 보니 내가 글쓰기를 꽤나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이기고 지는 문제가 되니 정말로 읽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왜냐면 판사를 설득해야 소송에서 이기기 때문이었다. 물론 변호사가 보기에는 형편없는 서면이었을 거다. 그래도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진지해져야 했다. 나는 변호사다 변호사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내 기준에서 잘 쓴 서면을 정의해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억울하다고 썼고, 어떤 사람은 억울하다고 왜 느꼈는지를 설명했다.
같은 ‘억울함’이라 해도, 한쪽은 주장을 반복하고, 다른 한쪽은 증거를 들이민다.
시간이 흐를수록 판사는 ‘누가 더 크고 강하게 말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논리적으로 설명했는가’를 본다.
서면에서 논리가 부족한 글은 그 길이가 길다. 증거도 없이 분량만 수십 장을 내기도 한다.
격한 표현이 많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반면, 사실로 쓴 글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증거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어떤 주장은 “나는 억울하다”만 되뇐다. 왜 억울한지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근거 없는 말들은 제자리를 맴돌 뿐, 그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잘 쓴 서면은 시간 순서대로 육하원칙에 따라 내용을 거짓 없이 쓴 글이다. 읽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고 무엇보다 사건의 실체를 알게 해 주는 서면이 판사를 설득할 수 있는 것 같다. 판사가 원하는건 그것 뿐이다.
판사들은 밥 먹고 글만 보는 사람들인데 분명 비논리는 예리하게 찾을 거라 생각된다.
침묵은 책임을 피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소송 초반,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장문의 글을 쓰고, 사건을 이끈다.
하지만 기일이 거듭될수록 양측의 서면들이 쌓이고 증거도 나온다.
이때부터 불리한 부분에서 눈을 감는다.
그 침묵은 전략일 수 있지만 판사는 그 장면을 다르게 보는 것 같다.
말을 시작했다면, 나중에 바꾸거나 침묵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신뢰를 만든다고 본다.
문장은 마음의 구조를 드러낸다
어떤 문장을 보면, 그 사람의 심리가 보인다.
“피고는 그 점을 입증하지 못했다.” 이런 말은 책임 회피의 전형이다. 왜냐면 원고가 권리 주장을 해서 소송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주장을 제기한 원고가 입증을 해야 한다. 피고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원합의하지 않았다.” 주로 증거 없이 이런 말을 반복하면 근거 없는 확언이라고 생각한다.
“증거는 있지만, 재판부가 요청하면 제출하겠다.” 이런 주장을 읽으면 이상했다.
재판부가 뭐가 아쉬워서 원고에게 증거를 요청을 할까 싶다. 그냥 증거를 당장 내면 되는 것이다.
서면의 문장들을 조합하면 그 사람의 언어 습관이 드러난다.
언어 습관은 사고 습관이고, 사고 습관은 태도다.
나 같은 사람도 읽어 낼 수 있는데 하물며 판사라면 더욱 잘 파악할 것이다.
감정적 공격은 금물
서면에 감정적 공격을 할 때가 있다. 이미 원고 피고는 감정이 격앙되어 있는 상태다.
그럴수록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글을 써야 한다.
인신공격이나 근거 없는 도덕성 비방은 판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감정적인 서면을 많이 받았다. 마치 내가 불같이 화가 나기를 바라는 듯한 글들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감정 쏙 빼고 논리적으로만 쓰자라고.
내가 깨달은 것은 글은 말보다 강하고, 잘 쓴 서면은 판결문에 그대로 녹아든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