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골드스타

by 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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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서 나오는 기상 노랫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뜬 정란은 같은 방 언니들이 하는 데로 대충 따라 씻고, 옷 입고 식당으로 갔다.

앞에서 큰 플라스틱 접시에 자기가 원하는 음식을 담는 순영 언니를 보고 이것저것 담아 먹고 작업장으로 갔다.

순영 언니는 반장님에게 정란을 소개하고 자리에 앉아 잘 보라며 부품 조립 방법을 알려줬다.

첫날이라 일이 손에 익지 않아 혼자 이리저리 고군분투하는데 반장님이 오셔서 정란에게 말을 걸어주셨다.

”정란아. 첫날인데 잘 따라 하네.

금방 언니들처럼 속도 빨리하겠다. “


젊은 남자 반장님이 떠나자, 순영 언니가 속삭였다.

”내 반장님 저런 말하는 거 오늘 처음 본다.

정란이 니 이뻐가꼬 그라는갑다.

남사시럽다. 조심해라이. “


키도 작고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삐쩍 마른 그 반장님은 정란의 눈에 그저 ‘피죽도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해 저렇게 말랐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다.

고단한 첫날이 지나고 자리에 누우려는데 같은 방 언니들이 순영 언니 이야기와 비슷한 말을 하였다.

”아까 반장님이 정란이 칭찬하는 거 들었나?

내 일하다가 놀래가꼬

부품 다른데 집어넣을 뻔했다. “

”내하고 나이도 비슷한 게 꼬박꼬박 반말해가면서 재수 없게 굴더니

정란이한테는 세상에. 목소리에 옥구슬 굴러가는 줄 알았다이가! “

”정란아~ 앞으로 조심해라이.

니 얼굴이 이뻐서 곤란하다 여기서는. “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이런 이야기 오가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았던 정란은 언니들의 이야기를 귀에 담지 않으려 애를 썼고 빨리 잠에 들고 싶었다.

태어나 오늘처럼 긴장되던 하루는 처음이었다.

씻고 자리에 누우니 정란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 짓던 냄새, 추운 겨울이면 아궁이에 구워 먹던 고구마, 몰래 주시던 정구지찌짐.

오늘처럼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도 처음이었다.

가족을 떠나 살아보니 어려웠던 그 시절이 춥지만 포근했고 따뜻한 울타리였고 정란에겐 전부였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정란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또 네 번의 사계절이 더 지났다.

그사이 정란은 휴가나 명절이면 꼬박 시골집으로 내려가 동생들에게 용돈과 선물을 주는 즐거움으로 살아갔다.

물론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정란에게 냉랭하셨지만 내쫓지 않는 걸 봐서는 아마 아버지도 정란을 내심 기다리신 듯했다.

”회사 공장 창원으로 이사 간다고 그라든데.

맞나? “

”네. 내년이면 아마 다 옮겨질 겁니더. “

”그라믄 니도 창원으로 갈라고? “

”아직 모르겠습니더. 생각 좀 해볼라고예. “

”언제든지 집에 온나. 알았제? “


스무 살이 넘은 정란이지만 아버지에게는 아직도 집을 떠난 17살 어린 딸이었다.

날이 갈수록 공장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공장이 곧 다른 도시로의 이전 마무리 단계라 같이 옮겨 갈 사람 또는 퇴직 신청을 받고 있었는데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라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직원이 대부분이었고 정란 역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이제 겨우 부산에 정 붙이고 익숙해졌는데 떠나려니 왜인지 아쉬운 마음이 컸고, 다른 일에 도전하고 싶기도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반장님이 정란에게 식후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반장님, 저 커피 안 마십니더.

하지 마라는데 왜 자꾸 주십니꺼. “


무슨 대꾸라도 하면 받아치기라도 할 텐데 도대체 갈수록 말은 없고 행동은 추파를 던지는 듯한 반장님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자꾸 눈길은 갔다.

삐쩍 마른 나뭇가지같이 작은 남자가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반장님은 결심이라도 한 듯 정란에게 다가와 할 얘기가 있다며

다가오는 일요일 밖에서 커피 한잔하자고 했다.

공장에서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일요일은 쉬는 날이라 그날은 외출이 가능했다.

”저 커피 안 마신다는데 무슨 자꾸 커피라고 하십니꺼.

무슨 얘긴데 돈 써가며 밖에서 합니꺼.

그냥 지금 하이소. “

”딱 한 번만 부탁 좀 할게. 한 번만 나와주라. “

반장님의 간절한 그 눈빛을 무시할 수 없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일단 이모가 졸업식 날 준 하얀 꽃 모양 핀을 머리에 꽂고 기숙사 근처 다방으로 간 정란은 기다리고 있던 봉식 반장님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공장에서 매일 보던 모습과 다르게 곱게 빗은 머리, 깔끔한 옷차림, 당당한 눈빛으로 정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봉식은 정란에게 자신의 가족관계, 공장으로 오기 전까지의 살아온 이야기, 공장으로 온 이후의 삶,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공장에서는 필요한 말 빼고 말도 잘 없던 양반이 이렇게 조리 있게 말하는 모습이 처음이라 끊지 못하고 듣고 있던 정란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얘기할라고 저 불렀습니꺼? “

”정란아. 아! 말 놓아도 되제? “

”그라이소. 이미 놓은 것 같은데. “

”내가 니한테 관심 있는 거 알고 있었제?

니는 내 어떻게 생각하는데? “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

”그러면 지금부터 한번 생각해 봐라. 내 생각에는 우리가 공장 옮기기 전에 결혼하고 둘이 같이 퇴직하고 퇴직금 받아서 그 돈으로 뭐든 시작할 수 있겠다 싶어서 니 불렀다. “

”결.. 결혼이라꼬예? 갑자기 무슨 말입니꺼? 제가 지금 겨우 스물둘인데 무슨 결혼입니꺼? “

”내 자신 있다. 한 번 믿어봐라.

처자식 굶길 일 없다. “


봉식의 당당함이 놀랍기도 했고 한편으론 믿음직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사실 그동안 몇 명의 언니들이 이른 결혼으로 인해 퇴사했는데 그때마다 내심 부러운 적도 있었고, 공장에서 이렇게 나이 들어갈까 봐 겁이 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봉식이라는 저런 키 작고 빼빼 마른 남자와의 결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또래보다 키가 큰 정란과 서면 봉식은 겨우 한 뼘 차이였다.

하지만 봉식에게도 좋은 점은 있었다.

공장에서 평판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머리도 똑똑한지 어린 나이에 반장님이 되었고 직원들이 하는 그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답을 잘하는 걸 보면 아는 게 많아 보였다.

쉬는 시간에 책이나 음악 감상하는 그 모습이 의외이기도 했고 다른 여직원들에게는 여전히 무뚝뚝한 점도 나쁘진 않았다.

봉식의 고백을 들은 그날 이후부터 정란은 봉식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니, 의식하기 시작했다.

정란은 그해 가을,

봉식을 데리고 시골 마을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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