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마주할 용기

by 송화

옥단 이모는 왜인지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다.

부엌에서 음식 준비하는 정란에게 속삭이듯 다그쳤다.

”니, 진짜 저 사람 때문에 선 보라는데 나가지도 않고 거절했나?

그 집이 어떤 집인데.

작아도 극장 하는 집이라서 현금이 집안에 쌓여있단다.

아들이 일 안 해도 시댁에서 생활비 꼬박꼬박 준다는데 그런 집을 마다하고 저런 사람이랑 결혼이라고? “

”이모. 그 집 아들내미 우리 공장에 소문이 파다합니더. 술 중독자라고.

술만 먹으면 사고를 그래 친다던데예?

시댁에서 주는 그 생활비가 어디 공짜겠습니꺼?

이모는 할머니가 다 알려주시잖아예.

알면서 내를 그런 집에 보낼라고예?

그리고 저 사람 키가 좀 작고 몸집이 작아서 그렇지.

내보다 훨~씬 똑똑합니더. “

”그래. 할머니가 다 알려주신다.

이놈이나 그놈이나. 그러신다.

저 사람 성격 보통 아니다.

니 맘고생 하는 거 내 못 본다.

그래도 결혼할 거가? “

”바보같이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성격보다야

할 말 하는 사람이 낫잖아예.

그리고 지금껏 내가 봤는데 조용하면 조용하지, 공장에서 화낸 적도 없습니더. “

”알았다. 그라믄 니 잘 들어라.

살다가 힘들어도 애들 봐서 참고

절대 집 나가지 마라.

그라믄 애들 스무 살 넘어가면 그나마 숨이 좀 쉬어질 거다. “

”스무 살예? 그냥 악담을 하이소. “

정란은 문득 지난날의 듣지 못한 의문에 대해 들을 용기가 생겼다.

시간이 더 지나가기 전에, 꼭 풀고 넘어가고 싶었다.

”.... 이모. 궁금한 거 좀.. 물어봐도 됩니꺼.. “

”뭔데? 어머니 얘기? “

”예.. 이제는 저도 들을 준비됐어예.

시집가고 나면 집에 지금처럼 자주 올 수 있을지 모르겠고,

아버지한테 물어볼라니까 아버지 상처 후벼 파는 것 같아서.. 어머니 그때.. 그.. 나무..

이유가 뭡니꺼?

도통 모르겠습니더.

허리가 아파서 얼굴이 자주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실 분이 아닌데.. “

”그래.. 정란이 니도 이제 많이 컸으니까,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너거 어머니 허리가 아니고.. 마음이 힘들었다.

가족이 있고, 자식들이 있어도,

그거랑 별개의 문제였다.

너거 아버지가 옆에서 아무리 채워주려고 노력해도 그건 어머니 혼자만의 숙제였던 거라.

아버지가 어려운 살림에 집 옆에 조그만 땅 사놓고 왜 밭으로 만든 지 아나?

너거 어머니 딴생각 못 하게 하려고 그랬다.

그래서 생전 밭에 가서 도와주지도 않고

지내신 거다.

바쁘게 살면 혹시나 이상한 생각 그만둘까 싶어서..

너거 아버지 진짜 노력 많이 했다.

어머니가 그날이 첫날이 아니었거든...

너거 학교 간 사이, 자는 사이..

그때마다 아버지가 일찍 찾아내서 겨우 몇 년 더 살았던 거라..

너거 아버지.. 어머니 때문에 새벽에 항상 긴장하고 주무셨을 거다.

그래서 그날도 그 새벽에 혼자서 어머니 발견했을 거고.. 이미 늦었지만.. “


정란은 듣는 내내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이모가 이야기하는 마음이 힘들어서 그런 선택했다는 부분이 정확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했을 어머니와 또 그런 어머니를 옆에 두고 항상 긴장하고 사셨을 아버지가 애처로웠다.

이모는 정란의 눈물에 마음이 아려왔다.

”정란아, 시집가서 잘 살아야 한다.

너거 어머니 위에서 편안하게 보고 있을 거다.

어머니에 대한 후회는 이 집에 다 놔두고 니는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어머니가 바라는 건 아마 그거밖에 없을 기다..“

방안에는 여전히 말이 없는 아버지와 두런두런 말을 많이 하는 봉식이 앉아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런 봉식이 왜인지 어색하지 않았다.

처음 본 사이인데 이웃집 청년처럼 살갑게 굴던 봉식은 정란이 다과상을 들고 들어가자 얼른 일어나 그 상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상을

바닥에 놓았다.

그 모습에 아버지는 둘의 결혼을 허락했다.

1980년 12월. 그들은 작은 결혼식을 올리고 퇴직금으로 작은집에서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1983년. 3월. 첫째 미진이 태어나고 둘은 순하디 순한 미진을 보며 세상의 아기들은 다 이렇게 순하게 잠만 자는 줄 알았다.

1984년. 12월. 둘째 영진이 태어나고 둘은 미진이가 보기 드물게 고마운 신생아였다고 생각했다. 틈만 나면 울어 젖히는 영진 덕에 시끄럽다고 전셋집에서 쫓겨났다.

1986년. 4월. 셋째 유진이 태어나고 동네에서 둘에게 붙여진 이름은 딸부잣집이었다.

공장을 그만둔 정란은 봉식의 제안에 집에서 육아를 맡았고,

봉식은 원하던 일자리는 아니었지만, 생계를 위해 적당한 일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봉식은 다른 집 남편과는 다르게 육아에 적극 참여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새벽이라도 정란이 수유할 때 다른 아이들이 깨기라도 하면 봉식은 바로 일어나 아이들과 놀아주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출근하기도 했다.

시장에도 항상 같이 가서 무거운 짐을 들어주고 회사 마치면 회식을 마다하고 바로 집으로 오던 봉식이었다.

동네에서 소문난 사랑꾼이자 애처가였지만 정란이 아이들을 맡겨두고 잠깐이라도 외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어쩌다 들키는 날에는 봉식은 굉장히 소리를 지르며 불같이 화를 냈다.

또 정란이 아이들과 어디를 갔는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누굴 만났는지 항상 예민하게 반응하고 어느 날은 소리를 지르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물건을 던지기도 했다.

모든 정답은 봉식이었고 봉식은 점점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어릴 때 아버지께 본 그대로 봉식은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 이 집의 군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신생아 시절부터 순하고 해맑던 미진은 국민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과묵하고 내성적인 학생이 되었다.

봉식은 첫째가 잘하면 둘째, 셋째가 자연스럽게 언니를 보고 배울 거라는 알 수 없는 희망에 미진의 공부를 틈틈이 가르쳤고, 착하고 순해 싫다는 말을 잘 못했던 미진은 그런 봉식의 뜻을 따랐다.

아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봉식은 어려운 집안 환경 탓에 하고 싶었던 공부를 이어갈 수 없었고 공장으로 들어가 집에 돈을 보내야 했다. 그런 그의 삶에서 공부란 잡고 싶지만 잡을 수 없던 끈이었고 그 끈을 미진에게 대신 잡게 해주고 싶었다.

결국 그 마음이 봉식을 공부시킬 때 무서운 아버지가 되게 하였고 아버지와의 공부 시간이 미진을 더욱 눈치 보고 불안한 성격으로 만들었다.

둘째 영진이 태어나고 집안은 울음소리로 늘 가득했다.

그 덕에 몇 번의 전세살이가 계약이 끝나기도 전에 옮기게 되었지만 결국 그 일들이 계기가 되어 그들이 빨리 집을 매매할 수 있게 한 숨은 조력자였다.

성격이 좋아 항상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았고 주말에는 늘 밖에서 친구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만 명절마다 봉식의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늘 심한 멀미로 인해 토를 하거나, 정란이나 봉식에게 어쩌다 혼이 나는 날이면 코피가 난다거나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는 일이 잦았지만, 건강상의 큰 문제는 없었다.

연년생인 둘을 키우며 그들이 커갈수록 정란은 불꽃 튀는 자매의 난을 종종 목격했다.

집안에 자매 없이 혼자 자랐던 정란은 가끔 그 둘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항상 조용하고 과묵한 언니 미진을 먼저 나무랐다.

그래야 그 소음에서 빨리 벗어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셋째 유진은 언니들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책을 사랑하는 딸이었다.

학교를 마치면 서점에 가서 책을 읽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덕분에 성적도 늘 우수했고 리더십 있어서 학교에서 늘 반장이었다.

날이 갈수록 봉식은 유진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커졌다.

그녀가 진지하게 배구를 배워보고 싶다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넉넉하진 않지만 딸 셋을 키우며 알뜰살뜰 미래를 위한 적금도 들고, 계모임으로 돈을 불리고, 집을 넓히는 재미에 정신없던 날들을 보낸 그들에게 불행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1997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전반에서 금융위기가 일어났고 기업, 은행들이 하나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실업자들이 증가했고, 임금을 못 받은 직원들은 일용직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집을 잃어 서울역에는 노숙자들이 넘쳐났고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스스로 목숨을 던진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보도되었다.

또 보육원에 버려지거나 부모가 맡기고 일을 하러 간 아이들의 숫자가 급증했다.

거리의 가게들은 대출 이자를 견디지 못해 폐업했고, 중고 매장에는 주방 기구, 집기, 가구들로 가득 찼다.


모두가 이를 갈고 생존을 향해 울부짖었고 봉식의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직원들의 임금을 두 달째 해결 못 한 회사는 필수 인력만을 남겨둔 채 인원 감축을 시행하였고 봉식도 당연히 그 대상이었다.

퇴직금이라도 일부 받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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