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인생 2막

by 송화

봉식은 퇴직금으로 겨우 살아가며 어떤 일이든 찾으려 애를 썼지만 녹록지 않았다.

일용직 사무실은 일 구하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였고 그마저도 키 작고 마른 사람이 행여나 다치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질까 봐 그들은 약해 보이는 봉식에게 일감을 주지 않았다.

아침이면 집 밖을 나가지만 허탕 치는 날이 늘어갔고 봉식은 점점 위기를 느꼈다.

집으로 들어온 봉식은 그날의 무너진 자존심을 이유 없이 가족들에게 풀었다.

여느 사춘기 아이들처럼 화면 속 가수들의 영상을 보는 딸들이 한심하게 느껴졌고 밥을 먹으며 오늘 어땠냐는 정란의 질문이 목을 조여오듯 숨이 막혔다.

그럴 때면 봉식은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며 숟가락을 던지고 밥상을 뒤집었다.

유리그릇이 바닥에 던져지며 와장창 깨졌고 봉식은 밥을 먹다 말고 밖으로 나갔다.

봉식의 화를 자주 목격한 아이들은 봉식이 집에 들어오면 각자 방으로 들어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펼치며 귀는 거실을 향해 집중했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봉식과 아이들을 본 정란은 모든 일들이 돈 때문에 일어나는 것 같아 생계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미진 아빠,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이제 애들도 컸고, 내 손이 많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나도 이제 일을 나가고 싶은데..

동네 언니가 같이 일 해보자 해서.. “

”언니? 누구? “

”창숙언니요. “

”지난번에 이혼했다는 그 사람 아니가? “

”맞아예.. “

”그런 사람하고 어울려 다니고 배울 게 뭐 있다고 같이 다니노? 일은 무슨 일? 니 내 지금 무시하나? 금방 일 구한다잖아. 기다리라데 왜 자꾸. 그리고 애들 성적 관리 하나? 지금 저 성적으로 애들 인생 망칠 일 있나? 누구 머리 닮은 건지 왜 저래 하나같이... 하.. “

”그러면 저 혼자 일하는 건 괜찮아예? 식당 가서 설거지라도 하고 싶은데.. 애들 학원비도 못 내고 있어서.. 식당 일하고 보태고 싶은데.. “

”뭐? 식당? 설거지? 니 지금 남들한테 내 욕 먹일라고 작정했나? 남편이 있는데 식당에서 설거지하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고? 머리가 그래 안 돌아가나? “

”몰래 하면 되잖아예. 주방에만 있는데 뭐 누가

볼 일이 어디 있습니꺼.. “


봉식은 정란의 말에 순간 화가 끝까지 치밀어 정란의 뺨을 쳤다.

”내가 하지 말라 하면 하지 말라고!! “

뺨을 맞은 정란은 얼어붙었다.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워 눈물도 나지 않았다.

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어 건네는 말이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살면서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손찌검당해본 적 없었고 배구를 하면서도 감독님은 기합을 주면 줬지, 때리진 않았다.

정란은 확실히 알았다.

이 모든 일들이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봉식은 자신의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가 떠올랐다.

시끄러운 소리에 자다 깬 봉식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툼을 문틈으로 목격했다.

마당 구석에서 아버지는 맨손으로 어머니의 뺨을 여러 번 때리고 계셨고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채로 그 자리에서 무기력하게 끝나기만 기다리셨다. 분이 풀리지 않은 아버지는 어머니를 세게 밀어 바닥에 주저앉혔고 그 뒤로는 두꺼운 무언가의 둔탁한 소리만 들렸다. 어머닌 맞으면서도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으셨고 다음 날 다리를 절뚝거리셨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아버지는 봉식이 중학교 갈 무렵 돌아가셨고 봉식은 어머니께 왜 도망가지도 않고 다 맞고 있었냐고 물었다. 옛날에는 다 그렇게 맞고 살았고 한 두 번 맞는다고 헤어지면 이 세상에 백년해로 하는 부부가 어디 있겠냐고 하셨다. 어머니는 어쩌다 맞은 것도 아니었고, 동네에 매 맞는 부인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말로 자기 자신을 애써 위로하였을까.


봉식은 여태껏 아버지를 증오하며 살아왔는데 자신이 그런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저지른 게 도무지 부끄럽고 숨고 싶었다. 살면서 누군가를 때리는 상상조차 해본 적도 없었는데 갑자기 정란의 어떤 말이 자신의 감정을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부분을 가리고 싶어 늘 책을 끼고 살았고 지식이 많으면 공장을 다녀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여러 분야의 책을 닥치는 대로 빌려 읽으며 배웠다.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결국 그도 시골의 천박한 아버지와 다르지 않음에 봉식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좌절했다.


봉식은 덜 자란 어른처럼 정란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정란은 봉식에게 밥을 차려주었다.

세 딸은 숨죽여 급하게 밥을 먹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집 안의 공기가 탁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이 탁하여 들이마시고 싶지 않았다.


뉴스에서는 IMF에 대하여 연일 보도가 되었고

전 국민적 금 모으기 행사가 열렸다.

신혼부부의 결혼반지, 아이들의 돌 반지,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기신 목걸이, 운동선수의 금메달,

어떤 가수는 받았던 트로피의 순금 장식품을 떼어 기부하였다.

작은 나라지만 위기 속에서 시민들의 단결력과 희생은 너무나 컸고, 그 덕분에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위기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처자식 굶길 일 없다던 봉식은 여전히 일자리를 찾지 못해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집에 가져다준 돈은 없었다.

정란은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녔고 이제 더는

빌릴 곳이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이렇게 다 같이 길바닥에 나 앉을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봉식이 취업하기만을 기다리기에는 봉식의 상태가 좋지 않아 고민 끝에 봉식에게 또다시 일자리 이야기를 해야 했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그에게 간 정란은 또다시 맞을 각오로 그를 깨웠다.

”미진 아빠, 일어나 보이소. 우리 이렇게 가다가는 조만간에 집까지 넘어갈 겁니더.

곗돈 부어놓은 거 이번에 내 차례라 목돈 생기는데 그거 가지고 쪼매난 거 장사하나 해볼랍니더.

당신하고 둘이 나가 벌면 지금보다 낫지 않겠습니꺼. 이래 누워만 있지 말고 뭐라도 해보입시더. “

웬일인지 봉식이 화를 내며 반대하지 않았다.

가장으로서의 한계를 느낀 그는 정란의 제안이 차라리 고마웠다.

정란은 봉식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가게 자리를 알아보고 중고 매장을 가 새것과 같은 중고 주방 집기류들을 사 와 매장을 차렸다.

지난 두 달간 이미 머릿속으로 메뉴와 가게 이름 고민을 해온 정란은 정구지찌짐을 메인으로 구성한 전집을 열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어려운 형편에 외식이나 밖에서 돈 쓰는 걸 아까워했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닌 찌짐을 돈 주고 사 먹는다는 게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나갈 때마다 기름 냄새가 사방팔방 진동을 했고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새로 생겼으니 한 장 정도 맛만 볼까 싶어 들어왔다가 단골이 된 손님도 많았다.

바다 가까이 있는 부산의 지리적 특성에 맞게 정란은 메뉴 개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새우 중에 사이즈가 작고 붉은색을 띠어 주로 국물 내거나 볶음 반찬에 쓰는 말린 보리새우를 보고 정란은 기본 찌짐에 넣어 구워봤다. 단골손님들께 시식용이라고 무료로 조금씩 드리니 바삭함과 감칠맛이 너무 좋아 돈을 주고라도 사서 먹고 싶다는 요청에 정식 메뉴가 되었고 이후로 보리새우 찌짐은 정란의 가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란은 밖에서 일을 하며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힘든 것보다는 백배 천배 후련했다. 게다가 장사도 생각보다 잘 되어 그동안 돈을 빌린 이들에게 이자까지 쳐서 다 갚을 수 있었다. 가끔 봉식이 예민해 보여도 정란은 돈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시절보다는 행복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손맛 덕분에 정란의 인생 2막이 펼쳐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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