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자유 도시, 부산

by 송화


만철 오빠는 여전히 부산에서 돈과 편지를 보내고 동생들은 그 돈으로 예전보다 슈퍼 가는 일이 늘어갔다.

정란의 여자 중학교 생활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중학교 가면 공부를 많이 한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학생들은 남진, 나훈아를 좋아하며 학교 쉬는 시간마다 끼리끼리 모여 서로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누가 누가 더 크게 부르나 대결도 하며 불꽃이 튀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나훈아의 부상 소식이 뉴스에 나왔고 그 때문에 수업 시간에 갑자기 우는 학생들이 생겼다. 남진의 팬이 나훈아를 다치게 했다는 잘못된 뉴스 때문에 학교에서 싸움이 일어났고 선생님들까지 나서서 말리는 사건도 있었다.


정란은 중학교 생활 3년 동안 공부도 하지 않았고 가수도 좋아하지 않았다.

정란의 관심은 오로지 부산이었다.

단 일 년 만에 바뀐 만철 오빠의 자유로운 얼굴이 궁금해졌다.

정란은 중학교 졸업만 기다렸다.


배구팀 선배 순영 언니는 작년에 발목을 다쳐

더 이상 배구를 하지 못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했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시골 마을에서 일이라고 해봐야 농사뿐이라

순영 언니는 도시로 가고 싶어 했다.

정란은 그런 순영 언니에게 부산으로 가보라고 제안했다.

가면 만철 오빠가 있으니 도움을 줄 거라고 했다.

곧 순영 언니도 부산으로 갔고 휴가를 받아 시골로 잠시 온 언니는 정란이네 집에 들렀다.

마루에 앉은 언니는 한쪽 구석에 놓인 라디오를 만지며 정란에게 물었다.

”정란아. 이 라디오 이름이 뭔지 아나? “

”걔도 이름이 있습니꺼? 라디오 아닙니꺼? “

”A 501이다. 이 제품도 참~ 오래됐다. “

”에이? 외국말입니꺼? “

”어. 영어다. 미국말. 회사 이름은 금성인데 영어로 골드스타. “

”언니, 부산 가더니 엄청 세련되었네요~ 미국말도 다 하고~

그런데 라디오에 대해 우째 그래 많이 알아예~? “

”내가 다니는 회사가 금성이다.

거기서 라디오 만들고 가끔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만들기도 하고. “

”우와! 언니. 너무 멋집니더!

거기서 밥도 줍니꺼? “

”어. 밥도 주고 잠도 재워준다.

심지어 바닥에 자는 거 아니고 침대다.

이층침대. “

”우와~ 거기다 돈까지 준다꼬예? “

”어.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이라고 꼬박꼬박 준다. 신기하제? “

”와~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습니꺼? “

”만철 오빠 덕분이지. 오빠가 소개해 줬다.

나중에 오빠 오면 꼭 고맙다고 전해라. “

”언니는 같은 부산인데 오빠 못 봅니꺼?

우리 오빠는 그 회사 아닙니꺼? “

”어디 다니는지 말을 안 해주던데? 니도 모르나? “

”예. 그냥 회사 다니는 것만 알고 있습니더. “

”그래? 잘 지내겠지. 내 이제 가볼게.

잘 지내고 있어라. 또 올게. “


순영 언니가 다녀간 뒤로 정란의 목표가 더욱 확실해졌다.

재능 없는 공부 때문에 앉아서 멍하게 수업 듣느니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정란은 중학교 졸업식만 기다렸다.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정란은 그 앞에서 무릎 꿇어앉아 설득 중이었다.

”누가 니보고 돈 벌어 오라 하드나! “

”공부에 취미 없는데 고등학교 가서 뭐합니꺼.

오빠 따라 부산 가서 돈이나 벌랍니더.

허락해 주이소. 아버지. “

”가스나가 돼가지고 어디 시집도 가기전에 출가한다는 말이 나오냐 이 말이다.

니가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안된다. 무조건 안 된다. 그리 알아라. “

”오빠는 되고 저는 안 되는 이유가 여자라서 안 됩니꺼? 그건 민주주의가 아닙니더. “

”됐다. 안 된다 하면 안 되는 기라.

다른 말 필요 없다. “

배구 이후로 무언가를 이토록 간절히 바란 적은 처음이었다.

정란이 아버지에게 말씀드린 건 허락을 맡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앞으로 닥칠 일들에 아버지의 충격을 조금 덜어드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며칠 뒤 정란은 집 근처 어머니 산소에 올라 큰절하고, 그 옆 영철이에게는 준비해 간 눈깔사탕을 올려뒀다.

한참을 땅속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 정란은 느티나무의 가지가 풍성하게

초록으로 가득 차던 날,

만철 오빠가 했던 것처럼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

터미널로 마중 나온 순영 언니를 만난 정란은 순영 언니 회사에 인사를 드리고 내일부터 출근하기로 하였다. 라디오 부품 만드는 공장 안을 들어가 본 정란은 그 크기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끝에서 끝까지 다 보려면 며칠은 걸릴 듯했다.


모두가 똑같은 청색 재킷을 입고 머리에는 똑같은 흰색 수건을 두르고 똑같은 의자에 앉아 일을 하는 그 뒷모습을 정란은 얼른 눈에 담았다.

내일부터 정란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그들의 틈에 끼어서 지내야 하는 곳이기에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관찰했다.

”인사는 이 정도 했으면 됐고 우리 이제 나가서 밥 묵자. 기숙사에는 저녁 전까지 들어가면 된다.

팀장님이 특별히 같은 방에 넣어주셨다. 잘됐제? “

”그라믄 우리 이제 매일 같이 잘 수 있겠네예. “

”아, 우리 방에 나머지 두 명도 다 정란이 니보다 언니거든. 좋은 사람들이긴 한데 한 번씩 피곤하면 신경질 조금 부릴 때도 있으니까 그것만 조심하면 될 끼다. “

”예.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야겠네예. “


순영 언니가 밥 먹자고 데리고 간 그곳은 돼지국밥집이었다.

주문하고 몇 분도 안 되어 국밥은 나왔고 순영 언니가 정란의 그릇에 새우젓을 조금 넣어주었다.

”먹어봐라. 입맛에 맞을 끼다.

이게 부산 음식이다. “


뽀얀 국물을 한 입 떠먹은 정란은 매일 먹으라 해도 먹을 수 있겠다며 깨끗하게 한 그릇 다 비웠다.

”내일부터는 일하느라 밖에 나올 시간도 잘 없을 끼다. 오늘 동네 구경 좀 하다가 들어가자.

기숙사 언니들하고도 인사 나눠야지. “

정란이 본 부산은 큰 도시답게 공장과 집들이 빽빽하게 모여있고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정신없어 보였지만, 미래를 향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꿈꾸는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질 것 같았고,

좋은 날들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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