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 딱 하나 있는 슈퍼 앞 평상에서
따끈한 고구마와 막걸리를 간식 삼아 드시던 어르신들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 속보를 듣고 계셨다.
처음 라디오를 보급받았을 때 만해도 어르신들은
이 작은 상자 속에 사람이 들어있나, 없나를 가지고 갑론을박하셨는데,
이제 라디오는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세상과의 소통 창구이고 맛있는 안줏거리였다.
”뉴스 들으셨습니꺼? 아니 어떤 미친놈이 비행기에서 조종사를 위협해 북으로 가자고 했다카는데예? “
”갈라면 지 혼자 갈 것이지,
왜 죄 없는 사람까지 끌고 가려고 작정했데? “
”폭탄은 또 우째 만들었는지 뱅기 안에서 터지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덥니더. “
”한 명만 죽고 그 죽은 양반 덕분에 나머지는 살았다는데예. 아주 영웅이지예. “
”그래도 이번엔 북으로 아주 안 넘어갔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꺼... “
막내 영철이 세상을 떠난 지 2주 정도가 흘렀고 세상은 남은 이들의 슬픔과는 관계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정란이네 집은 한동안 정적만 흘렀다.
방학 동안 그렇게나 떠들썩했던 집안에서 지난
2주 동안 흘러나온 소리는 방문 닫히는 소리,
끼익 끼익대는 화장실 문 여닫는 소리,
그릇 부딪히는 소리, 숨죽여 우는 소리
그리고 하루에 한두 번 집안을 살피러 온
옥단 이모의 목소리였다.
”정란아~ 정란이 있나? 만철이도 있제? “
어느 날은 훈련을 빠진 정란을 찾으러 선배 언니가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정란은 감독님을 찾아뵙고 그간의 사정에 대해 말씀드렸다.
떠난 동생에게 미안해서 앞으로는
행복한 일을 하며 살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감독님께서는 언제든지 받아 줄 테니 꼭 다시 오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정란은 다시는 배구공을 잡지 않았다.
매일 자책하던 만철 오빠는 잘 먹지 못해
살이 많이 빠졌고, 동생들은 생기를 잃었다.
이제 막내가 되어 버린 경철이는 아직 어리지만, 떼를 쓰지 않았다.
애도의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고 모두에게 상처로 남은 영철이가 떠난 그날의 일은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뭐 좀 드셔야 안됩니꺼..
오늘 한 끼도 안 드시고.. “
”괘안타. 아버지 신경 쓰지 마라. “
오랜만에 마주 본 아버지의 볼은 움푹 패어있고, 얼굴뼈 모양이 그대로 보였다.
입술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져 있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버지마저 잃을까 봐
두려운 정란은 뭐라도 해야만 했다.
옥단 이모네 집으로 찾아간 정란은 이모에게 정구지 어디서 구할 수 있냐고 물었다.
이모는 부엌 한편에 있는 정구지 한 단을 건넸다.
정란은 기억을 더듬어 정구지찌짐을 만들었다.
오랜만의 기름 냄새에 경철이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누나야.. 내 배고프다.. “
누나라는 단어에 잠시 울컥한 정란은 애써 참으며 만들어놓은 찌짐 일부분을 찢어 후후 불어 식혀 경철이 입으로 넣었다.
”누나야. 진짜 맛있다. “
목소리 크다고 혼내는 사람도 없는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경철이를 보니 정란은 또 울컥하였다.
”먹을만하나? “
”진짜 맛있다. 햄들 불러와도 되나? “
”아이다. 이거 가지고 우리가 방으로 가자.
아버지 하고 다 같이 먹자.
경철이는 간장 종지 들고 따라올래? “
그동안 제대로 된 밥 한 끼 못 먹은 아이들은 익숙한 냄새에 이끌려 손으로 찌짐을 찢어 그대로 입으로 넣었다.
익숙한 냄새에 익숙한 맛이었다.
”누나야. 이 찌짐 완전 어머니 찌짐이다!
우째 만들었노! 누나 대단하다. “
”만철 햄아. 이거 쪼매 먹어봐라. 진짜 똑같다. “
”너거.. 아버지 먼저 안 드리고 너거끼리 먹으면 되나.. “
정란은 아버지가 아직 한 번도 드시지 않은 걸 보고 작게 잘라 아버지께 드렸다.
처음에 별 기대 없이 드시던 아버지께서는 한 입을 드시고 정란에게 말씀하셨다.
”정란아. 팔아도 되겠다... “
그 말씀에 정란과 형제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속으로 차곡차곡 쌓아둔 슬픔과 억제된 감정을 정구지찌짐이 툭 건드려 와르르 무너지게 하였다.
그들은 그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가족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방학이 한 달 남았는데 만철 오빠가 아버지에게 갑자기 큰 도시로 나가 일을 하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중학교는 무조건 마쳐야 한다고 다그치셨고 만철 오빠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만철 오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오빠는 짧은 편지만을 남겨두고 집을 떠났다. 그 후로 집에 돈과 함께 간단한 편지만 보낼 뿐 오빠가 집으로 오는 날은 없었다.
아버지는 그 편지로 오빠의 생사를 알 수 있으니 그나마 안심하셨다.
방학이 끝나고 나머지 아이들은 학교로 돌아갔고 모두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내었다.
다시 일 년의 시간이 흘러 정란의 국민학교 졸업식이었다.
정란은 아침부터 분주히 아침밥하고 씻고
옷을 단정히 입고 나가느라 바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혹시 만철 오빠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식구 다 같이 모여 밥 한끼 먹는 게 예전에는 제일 쉬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 일상이
특별한 하루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침부터 옥단 이모가 찾아왔다.
”정란아. 준비 다 했나? 이모가 졸업 선물로
삔 하나 사 왔는데,
이거 머리에 하고 갈래? “
하얀색 꽃 모양 핀이었다.
머리에 꽂으니 얼굴이 더욱 화사해 보였다.
이모는 그런 정란을 보며 역시 어울릴 줄 알았다며 활짝 웃으셨다.
”오늘 끝나고 뭐 먹고 싶은 거 있나? 짜장면? “
”비싼 걸 뭐 하러 나가서 먹습니꺼.
그냥 집에서 밥 먹으면 됩니더. “
”이모 요새 용하다고 소문 나가꼬 다른 도시에서도 찾아오는 거 알제? 이모 돈 많이 벌었다.
끝나고 짜장면집 가재이. “
실제로 이모 무당집은 요즘 아침부터 집 대문 앞에서 줄이 서 있을 정도이고 이모부는 아침부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한과 하나씩 드리는 게 일이었다.
작년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다섯 명의 후보 중
3선에 도전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신민당 김대중 이 두 후보의 당선 확률이
자고 일어나면 엎치락뒤치락하였다.
라디오를 들으시던 마을 어르신이 이모에게 당선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고,
이모가 신의 영역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대답했다.
술이 얼큰히 취한 그 어르신은 마을 사람 여럿이 데리고 와 무당이 그런 것도 모르면서 장사하냐고 면박을 주었고 화가 난 이모는 무심결에 답하였다.
실제로 그 후보가 당선되었고 그날 이후 이모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생각해 보면 정란이 큰일을 겪을 때마다 이모는 항상 미리 알고 있었다.
느티나무에서 이모 집으로 뛰어간 날도 이모는 준비를 다 하고 마루에 앉아 있었다.
새어머니가 오신 날도, 영철이 떠난 날에도
이모는 늘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런 이모가 오늘 또 정란에게 기다리던 소식을 물어다 주었다.
”아따. 만철이 오늘 훤~칠하네. “
내심 기대했던 정란은 졸업식 내내 오빠를 기다렸다.
교장선생님의 축사도 들리지 않았고
교문만 쳐다보았다.
상장을 받고 다 같이 운동장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꽃을 들고 다가오는 만철 오빠를 발견한 형제들이 우르르 뛰어갔고, 정란도 신이 나
다 같이 부둥켜안았다.
그렇게 오랜만에 식구가 모여 사진도 찍고 짜장면도 먹어보고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만철 오빠는 부산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공장이 많아 젊은 청년들이 많고 또 바다가 있어 해산물도 저렴하게 실컷 먹을 수 있고
시골보다 놀거리가 많아 좋다고 했다.
오빠에게 들은 부산은 자유였다.
정란은 무엇보다 만철 오빠가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리고 부산이 궁금해진 정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