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퇴근

by 마흔로그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직 전 마지막 출근 날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생각지도 못한 공지가 내려왔다. 전 직원 조기 퇴근. 회사가 위치한 광화문 광장에서 바로 다음 날 BTS의 컴백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 주변 혼잡을 우려해 일찍 업무를 종료한다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소식에 웃음이 났다. 나의 휴직을 무려 BTS가 축하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행운 같은 조기 퇴근이었지만, 덕분에 마음은 급해졌다. 여유 있게 마무리하려던 계획은 사라지고 다급하게 짐을 정리해야 했다. 9년의 흔적이 담긴 업무 노트북의 자료들을 회사 클라우드에 백업했다. 수많은 프로젝트와 고민의 결과물들이 디지털 숫자가 되어 구름 위로 올라갔다. 노트북을 OA팀에 반납하고 확인증을 받는 순간, 비로소 내가 이 조직의 물리적인 연결 고리를 끊어냈음을 실감했다.


팀원들과 마지막 점심 식사를 마치고 본부장님과 상무님, 그리고 평소 감사했던 주변 팀 분들을 찾아가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푹 쉬고 좋은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따뜻한 환송이 이어졌다. 지난번에 느꼈던 것처럼, 나는 이곳에서 꽤 괜찮은 동료였다는 안도감이 다시 한번 차올랐다.


회사를 나와 올라탄 지하철은 조기 퇴근 덕분에 한산했다. 평소라면 퇴근 인파에 끼여 녹초가 되었을 시간인데, 환한 낮의 햇살이 지하철 객실 안으로 비쳐 들었다. 대단한 감동이나 시원섭섭한 감정이 몰아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음은 덤덤했다. 그저 아주 긴 휴가를 떠나는 정도의 가벼운 기분이었다. 아마 1년 뒤에 복귀할 곳이 있다는 안정감 때문일 수도 있고, 아직 이 자유가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제부터는 누군가 시키는 일이 아닌, 오로지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채울 수 있다. 문득 초등학생 시절 방학을 앞두고 커다란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던 생활계획표가 떠올랐다. 지난 9년 동안 내 삶의 시계는 회사가 정해준 틀에 맞춰 돌아갔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칸은 출퇴근 시간, 회의 시간, 업무 시간, 그리고 회사 동료들과의 점심시간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제 내 앞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커다란 원 하나가 놓여 있다. 초등학생 때처럼 내 마음대로 일과를 그려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놀고 싶으면 놀고, 책을 읽고 싶으면 읽으며, 잠이 오면 자고 달리고 싶을 때 달리는 삶.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다. 타인의 속도가 아닌 나의 속도로 움직이는 진정한 방학이 시작된 셈이다.


지하철이 역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회사로부터 멀어지는 거리만큼 자유가 가까워짐을 느낀다. 이제 시작이다. 9년의 마침표를 찍고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1년이라는 긴 여정의 첫걸음을 뗀다. 내일 아침,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뜨게 될 그 첫 번째 휴직의 아침이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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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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