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라는 관성을 깨는 일

by 마흔로그

내 앞의 한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휴대폰과 노트북을 번갈아 확인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검색하더니, 이내 다시 한번 긴 숨을 몰아쉰다. 그 모습이 꽤나 간절해 보여 이유를 물었다. 그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가 생겨 아내와 다섯 살 딸아이를 데리고 발리에서 한 달간 머물다 올 계획이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이었다.


보통의 휴가처럼 일주일 남짓 다녀오는 것이라면 적당히 기분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정은 무려 5주다. 한 달 살기라는 것이 유행이라지만, 막상 계획을 세워보니 만만치 않은 비용에 자꾸 한숨이 나온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리다 보니 너무 저렴하거나 평범한 숙소를 고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눈높이를 높이자니 35일간 누적될 숙박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기간을 줄이자니 ‘한 달 살기’라는 상징성이 사라질 것 같고, 숙소 수준을 낮추자니 가족의 고생이 눈에 선해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한다. "그게 뭐가 걱정이야?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인데, 가족과 한 달이나 시간을 보내면서 돈 좀 더 쓰는 게 어때서. 무리하자는 게 아니잖아. 5주나 가는 여행에서 100만 원, 200만 원 더 들여서 만족감이 훨씬 올라간다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지. 이럴 때 쓰려고 그동안 힘들게 돈 벌어온 거 아니야?"


남이 보면 참 부러운 상황인데, 고작 그 정도 금액 때문에 이 소중한 시간을 즐기지 못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동안 절약하며 살아온 습관, 그리고 모든 선택에서 항상 '가성비'를 최우선으로 따졌던 버릇 때문에 쉽사리 예산을 높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한숨을 쉬는 지인도 나였고, 큰소리치며 조언하는 나 또한 나였다.


육아휴직을 결정하며 외벌이 가장으로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지점은 역시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휴직 기간 발생하는 경제적 기회비용을 엑셀 시트에 올려놓고 수없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결과적으로 감당 가능한 수준이라는 판단이 섰기에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기회비용에 '발리 한 달 살기'라는 이름으로 약 1,000만 원의 지출을 더하려 하니, 내 몸속에 깊이 박힌 관성이 강하게 제동을 걸어왔다.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여보려는 마음은 내가 살아온 세월의 관성이다. 반면 인생에 단 한 번 뿐일 이 기회를 온전히 누려보고 싶은 마음은 새로운 작용이다. 이 두 마음이 충돌하며 생기는 반작용이 생각보다 거세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행복해야 할 여행 계획의 과정이 숫자를 따지느라 괴로움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행은 떠나기 전 계획을 세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가성비라는 내 인생의 제1법칙에 매몰되어 그 행복을 스스로 깎아먹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는 내 삶을 지배해 온 관성의 힘을 조금 빼고, 새로운 작용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때다.


오늘 퇴근하면 아내에게 웃으며 말할 생각이다. "여보, 숙소 예산 좀 더 높이자. 우리 이왕 가는 거 아쉬움 남지 않게 제대로 다녀오자."


가성비라는 잣대를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발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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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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