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저주 1

달리기는 무서워

by 주선생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의 첫 운동회날이었다.

간식과 돗자리를 챙겨 들고 소풍 가는 아이 마냥 내가 더 들떠서 앞장을 섰다. 학교 운동장 둘레로 소담한 벚꽃이 진 자리에는 버찌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고 적당한 온도의 봄바람은 산뜻했다.

국민체조를 시작으로 레크리에이션 게임도 곁들여져 축제 같은 운동회가 이어졌다.


드디어, 1학년 100m 달리기 순서.

‘엄마 아빠의 운동신경을 닮았으면 1등은 껌이지.’ 하며 잔뜩 기대했다.

"저기 두 번째 얘 키도 크고 딱 봐도 잘 뛸 것 같아."

모르는 사람들도 우리 딸을 눈여겨보니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준비, 땅!"


앞으로 확 치고 나와 결승선까지 단숨에 달려 나가야지. 그렇지.

어? 눈을 씻고 보니 1등으로 달리는 아이는 내 딸이 아니었다.

두 번째, 세 번째도 아니고 저 뒤에서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달리고 있는 딸아이는 곧 울음보가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포기는 안 하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는지 선생님이 다음 순서인 남자아이들을 출발시켰다.

뒤 순서의 1등과 같이 들어오는 우리 딸.

시험지 100점보다 달리기 1등이 훨씬 값어치 있다고 여기며 살아온 내 인생에 스크래치가 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달리는 모습과 묘하게 일치하는 영상이 머리를 휙 스쳐 지나간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인데...


집에 오는 길에 풀이 죽어있는 딸아이에게 위로랍시고 한마디 했다.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지. 달리기는 별거 없어. 그냥 총소리와 함께 앞만 보고 달리면 돼."

"근데 엄마, 난 달리기 못 하겠어. 앞에 뭔가 벽 같은 게 있는 것 같고 달리면 부딪힐 것 같아서 무서워."

"어?, 그게 무슨..."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딸아이의 달리기와 오버랩된 그 낯익은 모습도 서서히 형체를 찾아가는 듯하더니 내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맙소사!'


국민학교 때, 나는 달리기만 잘했고 언니는 달리기만 빼고 다 잘했다.

10리 길을 5년 정도 걸어 다녔으면 단련이 될 만도 했으련만 느림보 거북이 같은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언니도 내 성적 통지표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안 됐을 수도 있었겠다.


매달 월말고사 후 성적우수상은 기본이고 다독상, 그리기 상, 글짓기상, 자연 관찰기록 상 등 아침조회 때마다 언니는 늘 단상 앞에서 다양한 상을 많이도 받았다.


"언니, 나 상장하나 만 주면 안 돼? 오늘 세 개나 받았잖아."

"뭐? 상장을 어떻게 줘. 이름도 다른데."

"5학년은 3으로, 이름은 끝에 한 글자만 살짝 바꾸면 되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잔머리 굴리지 말고 구구단이나 열심히 외워. 또 틀려서 남지 말고. 공부도 못하는 게."

"지는, 느림보 거북이 주제에."

성이 난 나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뜀박질을 해 저만치 앞서갔다.


그렇게 잘난척하던 언니도 기가 팍 죽는 날이 있고, 늘 기죽어 있던 내가 펄펄 날아다니는 날이 있었다.

바로 가을운동회.


만국기가 하늘을 휘감고 경쾌한 음악이 운동장을 울리면 온 동네사람들이 가을 추수도 잠시 뒤로 한 채 도시락을 싸 들고 모이는 잔칫날이었다.


1학년들의 꼭두각시춤부터 고학년의 부채춤, 기마전까지 학생들은 몇 달 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맘껏 뽐냈고 학부모와 선생님들이 참여하는 게임까지 프로그램은 쉼 없이 돌아갔다.


학년별 100m 달리기 시간. 순서가 끝난 나는 1등 도장이 쾅쾅 찍힌 손목을 흔들며 엄마한테 달려갔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있자니 언니가 출발선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뛸 때보다 더 긴장되는 순간이다.

‘앞만 보고 달리면 돼. 꼴찌는 하지 마.’ 속으로 응원 비슷한 것을 했다.


"언니는 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호호호." 엄마는 삶은 알밤을 내 입에 넣어 주며 웃으셨다.


총성과 함께 몸을 날려야 하는데 언니 혼자 한 박자 쉬고 출발한다. 흐느적흐느적,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 속력으로 트랙을 방황하는 언니 덕에 운동장엔 정적이 흐를 판이다. 친구들이 한 마디씩 하는 것 같아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눈치 빠른 체육 선생님이 다음 순서 얘들을 출발시키면서 시선은 분산되었다.


‘아으, 느림보 거북이 올해도 또 꼴찌네.’


곧이어 운동회의 하이라이트 청백 계주가 시작되었다. 청색 머리띠를 두른 나는 3학년 청군 대표다.

나보다 키가 큰 백군 친구는 왠지 더 여유로운 척했지만 연습 때 실력이 비슷했기에 신경 쓰이지 않았다.


팀을 믿고 나에게 더 집중하면 될 일이다. 가볍게 발목을 풀고 팔랑팔랑 손목도 털어준 다음 출발선에 섰다. 넘겨받은 바통을 꽉 쥐고 쏜살같이 나아간다. 운동장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응원 소리를 등에 업고 달릴 때의 그 짜릿함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내 몫을 해냈다는 뿌듯함, 여섯 명이 협력하여 좋은 결과를 얻으니 기쁨도 배가 되는 것 같았다.


이런 날은 집에 산만큼 쌓여있는 언니 상장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

나는 언니가 못하는 달리기로 받은 공책이 산만큼 쌓였으니.


"나, 공책 몇 권만 주면 안 돼?"

집에 오는 길에 언니가 조용히 엄포를 놓는다.

"달리기 꼴등 해서 상품 못 받은 거 동네 사람들도 다 아는데 공책은 왜?"

"하나도 없으면 좀 창피하잖아. 세 개만 줘"

"아니, 그냥 냅다 뛰면 되는데 그게 뭐가 어려워? 진짜 답답해.”

"야, 달리기는 무섭잖아. 앞에 막 벽이 있는 것 같고, 뛰면 부딪힐 것 같고 그렇단 말이야. 너도 담에 달리기 엄청 못하는 딸 낳으면 내 마음 알겠지. 치사해서 공책 안 받을 거야. 그리고 꼴등이 아니라 4등이야. 알지도 못하면서.”


산수 못한다고 나를 우습게 보는 건지 자존심은 있어서 끝까지 4등이라고 우긴다.

“별걱정을 다하네. 내 딸은 절대 달리기를 못할 수가 없지. 언니 딸이면 모를까. 그리고 네 명 뛰어서 4등이면 그게 꼴찌야.”

"아오, 저게 진짜."

언니가 시뻘게진 얼굴로 빈주먹을 들어 올리자 난 쌩하니 토꼈다.



그럴리는 없다고 언니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는데 그 옛날 언니의 말이 씨가 되어 새록새록 자라난 것일까?


앞서가는 딸아이의 축 처진 어깨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그때 언니한테 공책 세 권 줄걸.

딸아이 운동회에서 학부모 달리기 상품으로 받은 빨간 소쿠리라도 언니한테 건네줬어야 했나?


내게 쉬운 게 남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는 거, 역지사지의 마음을 오늘에서야 깨친다.


그나저나 이모의 운동신경을 닮은 우리 딸은 그 뒤로도 쭉 한결같이 뜀박질에는 소질이 없었다.


공부 잘하는 것들은 저주의 힘도 센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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