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의식 VS 언어]

인간이 `미완성(~ing)의 존재`인 이유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1857년 태생의 스위스의 언어학자로 근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로 불린다.

저서로 <일반언어학 강의>가 있는데 소쉬르는 직접 책을 출판하지는 않았고

제자들이 강의를 편집하여 완성한 것이다.

[출처] 위키백과, 현대철학로드맵 -페르디낭 드 소쉬르-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707%EF%BC%BF153625%EF%BC%BFGoogle.jpg?type=w966 구글 이미지 -페르디낭 드 소쉬르-


근대의 중심 주제는 `의식`이다.

언어의 역할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언어는 의식을 전달하는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소쉬르는 언어학에서 `자의성恣意性; arbitrarines`의 원리`에 근거하여

세계를 나누려고 시도하는데


미리 정해진 의미가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에 의해 세계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다른 세계가 등장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고 말한다.


곧 의식과 지식의 형성에 언어가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언어는 단순히 전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본질적인 도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를 차이성의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소쉬르는 말하고 있다.


먼저 `자의성恣意性; arbitrarines`이란


언어에서 소리와 의미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은 특성.

언어의 형식과 내용의 관계가 꼭 그리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성질.

어떤 소리와 그 소리가 나타내는 개념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이라는 뜻이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한자사전, 지식백과 -자의성-


이다.


말하자면

우리말로 '희다'라고 하는 것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화이트(white)'라고 하기도 하고

'블랑(blanc)'이라고도 하는 것처럼 언어의 소리와 의미 사이의 이와 같은 관계를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한다.


이처럼 소쉬르는 `랑그와 파롤`이라는 개념도 제시한는데


랑그Langue는
국어나 프랑스어처럼 일정한 공동체에서 쓰이는 언어를 말하고


파롤Parole은
개인이 평소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언어 행위를 말한다.


가령 사람들은 공통적인 '살다'라는 낱말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이를 랑그Langue라고 볼 수 있고,


실제 대화할 때 상황에 따라 '살다'는 조금씩 다른 느낌(뉘앙스)을 줄 수 있는데,

그 각각의 용례들을 파롤Parole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이나 억양에 따라 받아들이는 뜻이 달라지는 것도 이 파롤Parole 때문이다.

두 명의 사람에게 '살다'라는 것을 발음하게 했을 때보다

열 명의 사람에게 발음하게 하면 각각 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파롤Parole 때문이다.


또 소쉬르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개념도 말하고 있는데


시니피앙signifiant은
`개`를 가리켜 `개`라고 하는 음성은 시니피앙이고


시니피에signifie는
`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연상되는 `개`가 시니피에이다.


말하자면 시니피앙은 소리를 말하고

시니피에는 의미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한국 철학에서 말하고 있는 이理와 기氣의 개념과 같은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처럼 같은 개념을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곧 시니피앙은 발현되어 나타난 것으로 랑그 또는 기氣일 것이고
시니피에는 발현되어 나타난 것이 가지는 의미로써 파롤 또는 이理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어떤 상황이나 상태를 보더라도

모든 사람이 저마다 각각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로 곧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개념과 의미를 표현하는 방식보다

그 표현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 소쉬르는


`언어가 세계를 이해하는 본질적인 계기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박경리 소설 `토지`를 읽는다고 했을 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그 울림을 전달하기 위해

장황하게 상황을 글로 표현하고 10권까지 책으로 엮어

전달하려는 것이 바로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10권 정도의 분량으로 작가가 느낀 그 무엇을 전달해야

읽는 사람이 그나마 가깝게 작가의 의도를 알아낼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그 의미를 찾지 않더라도

`롤랑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읽는 사람만의 그 어떤 의미를 캐치하는 것도

그 글의 `시니피에` 또는 `파롤` 또는 `이理`를 파악하는 길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만일 글의 주제도 없고 구성도 엉망이고 중구난방으로 쓴 글처럼

아무렇게나 쓴 글에서도 독자가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그 글은

좋은 글 혹은 도움이 되는 글, 의미가 있는 글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작가의 철학과 의도가 있어야만 작품이 생명력을 갖게 되므로

작품 속의 글의 주제와 구성은 짜임새 있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글의 주제도 없고 구성도 엉망이고 중구난방으로 쓴 글에서

독자가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글의 전체 맥락이 아닌

그저 한 대목 또는 한 줄의 문장에서 혹시라도 찾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작가가 글의 구성과 주제와 소재를 적절히 배치하여

여러 가지 의도를 담아서 쓴 완전하다면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글에서 작가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독자의 의도도 중요하다는 뜻인 것이다.


내가 느낀 그 무엇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공감시키기 위한

도구가 `언어`밖에 없음에도

그 전달이 완벽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를 전달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미완성`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 도구가 언어 외에 미술과 음악 등 다양하게 있지만

이 모두가 완벽하게 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아닌 것이며


저마다 각각 행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언어를 통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에서

인간이 `미완성`된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자연과 우주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결코 `완성`된 그 무엇을 또는

허점이 하나도 없는, 바이러스가 절대로 침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을 자연과 우주가 인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창과 방패`처럼

창이 방패를 깨뜨려 이겼다 싶으면

이 창보다 더 강력한 방패가 나타나 이 창을 막아버린다.

그래서 방패가 정복했다 싶으면 또 다른 창이 나타나 방패를 깨뜨려 버린다.


이처럼

무언가 하나를 이루어내어 다 이루었다 싶으면

또 다른 무언가가 나타나고 그것을 정복했다 싶으면 또다시 무언가가 나타나므로

완성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고로 인간은 늘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미완성의 존재`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미완성의 존재`가 항상 나쁘고 부족한 것은 아니다.

결과를 향해 늘 `진행 중~ing`인 상태에 있다는 것뿐이다.


문제는 무엇으로 `진행 중~ing`인가이다.


`하이드`로 진행 중~ing이거나 `프랑켄슈타인`으로 진행 중~ing 이면 어떻게 될 건가?

이들은 분명히 실험 과정 중에 멈출 수도 있었고 방향을 바꿀 수도 있었다는 것이

우리가 깊게 생각해 봐야 할 점이다.


지금 현대 우리가 `진행 중~ing`인 과제에 대해서

혹시라도 부작용이 보인다면 또는 누군가 경고를 한다면

과감하게 인정하고 멈추어 부작용과 경고에 대한 대안을 찾은 후

다시 `진행 중~ing`을 해야 될 것이다.


누구나가 수긍할 수 있는 `진행 중~ing`을 기대해 본다.


언어가 세계를 이해하는 본질적인 계기이자 도구이므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과정~ing중에 있는 것처럼

인간도 미완성인 과정~ing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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