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존재자`이면서 `존재`이고 `현존재`인 이유
틴 하이데거는
1889년 태생의 독일의 철학자이다.
현상학, 해석학, 실존주의에 관해 20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1명으로 평가된다.
전기에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문제 삼는 존재자'(현존재)를 분석하는 기초 존재론을 주장하였으며,
후기에는 현대의 과학 기술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면서 자연에서 받는 시적 감수성을 가지고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는 철학적 작업에 몰두하였다.
저서로 <존재와 시간>, <철학에의 기여>, <휴머니즘에 대하여>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마르틴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 곧 그냥 거기 있는 것을 `존재자`라고 하고
거기 그냥 있는 것들이 한 인간을 통해 가지게 되는 의미를 `존재`라고 말하며
그리고 한 인간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구분한다.
하이데거는
플라톤 이후 서양 철학이 그냥 거기 있는 것인 `존재자`에만 국한하여 생각을 하고
그 `존재자`가 의미 짓는 `존재`라는 개념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그냥 거기 있는 그 `존재자`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전달되는 것들을 놓쳤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김춘수의 시 `꽃`을 생각하면 되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출처] 김춘수 -꽃-
`존재자`로서의 `꽃`이 그냥 거기 있는데
내가 꽃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나에게 다가오는 꽃`은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자`는 소쉬르 입장에서는 `시니피앙`이고
`존재`는 역시 소쉬르 입장에서 `시니피에`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하이데거는
이 개념에 `시간`을 끌어온다.
`존재자`인 `꽃`이
지금 그 꽃을 부르는 나에게 의미 지워지는 `존재`로서의 `꽃`으로 다가오지만
시간이 흘러서 그 꽃을 부르는 나에게 의미 지워지는 `존재`인 `꽃`은
또 다른 의미의 `존재`인 `꽃`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와 `30년 전의 나`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면서 드러내는
그 `시니피에`를 `존재`로 개념 짓고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책이 <존재와 시간>이다.
용어에 의해서 어떤 의미가 정해지고 이해되는 것이므로
실제 `존재자`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아닌
우리들이 언어라는 도구로 해석한 의미로 세계가 규정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세계는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의 세계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언어의 한계`가
이렇게 우리의 세계를 한정 짓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세계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언어의 한계`가 아니라
세계 또는 세상 모든 만물과 우주가 수시로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그 세계가
그 자체로 한계가 있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라면
우리가 언어로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반드시 한계는 아닐 것이다.
이 세상 자체가 한계인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의미 지우려고 사용하고 있는 도구인 언어가
한계를 가진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정말로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나의 뇌에 찾아온 것이라면
지구 밖의 어떤 존재가 `나`라는 캐릭터에
이 생각을 하게끔 데이터를 조작하고 있는 것이라면
심심해서 `나`를 자신의 컴퓨터 화면에서 사라지게 한다면
장례식까지 치러주는 아주 정교한 컴퓨터 게임이라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말하는 이 세상 자체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시뮬라시옹)일지도.
그냥 거기 있는 어떤 것 곧 `존재자`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전달되는 어떤 이미지 곧 의미에 대하여
철학적 개념을 정립한 사람이 바로 `하이데거`이다.
플라톤 이래로 시간 속에서의 변화 과정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있는 것 자체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존재자`의 의미인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존재자`가 풍기는 `존재`를 인식하고 느끼고 의미 짓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으므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생각하든 `소쉬르`가 생각하든
자신이 생각한 개념과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는 도구가 `언어`이다 보니
이들의 생각의 전개 과정도 한계 지워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그림이나 조각, 음악으로 나타내는 것은
그 개념과 의미에서 더 멀어질 것이고 말이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보면
변화무쌍한 `존재자`를 의미 지울 수 있는 도구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시詩`
즉 `시詩`야말로 어떤 `존재` 또는 `시니피에`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도구일 수도.
그런데
이러한 `존재자, 존재, 현존재`라는 언어로서의 구분이
`관념론`을 반박하는 `유물론`의 입장과 같아 보인다.
무거운 돌을 발로 차면서
"나는 그것을 이렇게 논박합니다!"라고
[출처] 위키백과 -조지 버클리-
버클리가 반박한 것처럼
그냥 거기 있어서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존재자'로 있는데
누군가가 그 무거운 돌이 저기 있네 라며 의식을 하면 '존재'가 되어 의미 지워진다는 말이
그저 막연한 인간들 의식 또는 생각 속에 있는 관념론일 뿐인 것이다.
그냥 거기 있어서 존재자로 있는데
굳이 누군가에게 읽혀져서 존재로 바뀌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지금 나의 글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가 읽혀짐으로 '존재'가 되었지만
아직 '나'의 글을 알지 못하는 브런치 독자에게는 '나'는 '존재자'일뿐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존재'이면서 '존재자'인 것이고
누군가를 읽으면서 의미 지우는 '현존재'인 것이다.
시간에 따른 변화에 따라
인식하는 우리들의 사고와 감정 등이 달라지는 것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매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가 '시간의 의미'를 바탕으로
학술적이고 이론적으로 정립했다는 것에 의의를 가지면 될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김춘수의 '꽃'을 읽고 느끼며 생각되는 것은
내가 그 꽃의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그 꽃이 나에게 다가와 나의 '꽃'이 되겠지만
꽃 입장에서는 이름을 부는 '나' 때문에
의미 지워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 꽃은 다른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다.
지금 나는 글을 쓰고 있지만 내일 해가 뜨면 일터로 간다.
일터로 가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나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존재자`였다가
일터로 가는 순간 누군가 나를 인식하므로 `존재`가 되고
그 일터에서 옆에 있는 누군가를 인식함으로써 `현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존재'인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누군가에게는 `현존재인 나`가 그저 `존재자` 그냥 거기에 있어서 일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