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이야기
미니멀 라이프를 알기 전, 여기저기 참 기웃거렸다. 아이를 키우는 보람도 있지만 가끔 나를 잃어버리는 기분에 휩싸이면 가슴 한편이 시렸다. “나는 뭘 잘했지? 뭘 하고 싶지?” 나는 나에게 종종 물었다. 육아를 하며 공무원 시험공부도 잠깐 해보고 전공을 살려 워킹맘이 되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육아와 일의 병행은 나에게 무척 어려웠다. 뭐든 간절해야 잘 해낼 수 있는 법인데, 바깥일에 열정을 쏟아부으려니 가정일이 조금씩 소홀해져 갔다.
2019년 말,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나가고 일상이 멈춰버렸다. 사람과의 접촉은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상황이라 어린아이들은 집에서만 활동했고 누구든지 곁에는 어른이 필요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어느 누구도 아닌 내가 되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로 아이들을 돌보며 온전한 전업주부가 되기로 했다.
엄마와 전업주부, 같은 사람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엄마는 아이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해 준 존재이고 전업주부는 집안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다. 전업주부는 남편이 될 수도, 비용을 들여 가사도우미를 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엄마=전업주부’로 마음먹었고 이제부터는 ‘우리 집=나의 일터’라는 나름의 생각을 가졌다. 나의 엄마는 그랬다. “애들 잘 키우는 게 돈 버는 거야.” 그렇게 보이지 않는 돈도 모으게 되었다.
“진심아, 하루 중 어떤 집안일에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니?”
단연코 ‘주방’이다. 온 가족을 위한 건강한 먹거리는 중요하고 주방에서 시간을 할애해야 음식이 나오며 그건 나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얼마나 시간을 쓰는지 생각해 보면 아침, 점심, 저녁시간을 합해서 평균 3시간 정도 되지 않을까? 손 많이 가는 요리를 할 때나 주말, 아이들 방학기간에는 이 시간이 더 늘어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소꿉놀이를 곧잘 했다. 흙탕물을 만들어 커피 잔에 담아 어른처럼 마셔보는 척해보고 풀을 뜯고 잘라 반찬접시에 담아보기도 했었는데, 참 재미있는 놀이였다. 그때처럼 소꿉놀이하듯 즐거운 주방으로 변화하는 일은 어른이 된 눈으로 보니 ‘수고로움을 덜어내는 일’이었다.
요리를 시작하기 전 냉장고 문을 열어 식재료를 확인하여 꺼내고, 싱크대 안에 조리도구와 냄비 그리고 필요한 그릇을 꺼낸다. 요리 과정 중에 싱크대 위 도마와 칼은 언제든 재료손질을 위해 사용되고, 3구 인덕션 중 2구는 매번 냄비가 올려져 있고, 각종 양념도 넣어야 하니 필요시 계속 꺼내 쓰고, 나는 여기서 이것 하랴 저기서 저것 하랴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실 이런 움직임들은 지극히 기본적인 동작이다. 더하면 더했지, 뺄 수가 없는 기본 활동에서 무엇을 덜어낼 수 있는지 고민했고 그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주방에 있는 모든 문을 열어보자. 싱크대, 냉장고, 수납장 등등 말이다. 열어놓은 뒤 최소 1분 이상은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처럼 보면 볼수록 좋다. 그리고 그 순간 드는 느낌과 생각을 마음속으로 속삭여본다. 그 속삭임이 달콤했다면 모를까 말문이 막히고 한숨이 내쉬어진다면 그건 바로 시그널이다. 마음의 소리를 알아차리고 시작하려는 스스로와의 준비는 꼭 필요하다. 그래야만 덜어낼 수 있고 이런 작업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짐을 느낄 것이다.
나의 주방에는 싱크대 상부장이 없다. 2016년 경주에서 발생한 5.8 규모의 대지진을 뉴스로 보면서 갑자기 내 머리 위에 있는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그래서 싱크대 상부장 안을 조금씩 비워나갔고 몇 년 후 빨간 벽돌집에 들어갈 때는 아예 하부장만 설치했다. 살다 보면 주방 살림살이가 늘어나는 건 시간문제니 불필요한 것들은 중간중간 덜어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11자 주방, 인덕션 아래 서랍 두 칸에는 조리 시 바로 꺼내는 13년 된 스테인리스 냄비들이 있고, 왼쪽으로 양념레일 수납장이 있다. 오른쪽에 하부장 문은 세 개로 첫 번째에는 큰 접시종류와 유리밀폐용기, 두 번째는 스텐볼 3종, 체망, 부식재료, 베이킹 도구가 있고 세 번째는 믹서기, 텀블러, 간식, 그 외 빈 공간이 있다. 아일랜드 싱크대 옆은 전기밥솥이 있고 그 오른편 문을 열면 매일 사용하는 밥그릇, 반찬그릇, 컵이 있다.
웬만하면 지속가능한 스테인리스나 유리, 도자기 제품을 사용한다. 플라스틱 제품은 김치통에 주로 쓰이고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이상 지양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조리도구 역시 최소 하나, 많으면 두 개정도로만 있고 모두 스테인리스나 실리콘 제품이다. 그리고 모든 주방에 쓰이는 물건들은 제자리가 있다.
냉장고 속 식재료는 영원하지 않다. 잠시 잠깐 머무르기 위한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냉동실도 냉장실도 꽉꽉 채워놓지 않는다. 냉동실에는 엄마가 해마다 주시는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 육수용 멸치, 새우젓, 다시마는 항상 들어있지만 그 이외의 식재료는 한 두 달이 넘어가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다. 냉동실에는 없을 것 같아 보여도 곰팡이가 번식하기에 방심은 금물이다.
냉장실에 고추장, 된장, 달걀, 두부 정도는 비워지기 전에 구입하는 편이고, 반찬은 오래 두고 먹기보단 소량으로 만들어 소진하지만 사실 식구들은 그날그날 만든 메인 요리나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뭘 만들지 생각해 보고 마트에 들러서 필요한 재료만 그때그때 구입하여 냉장고에 넣는 편이다. 채소의 상태는 자주 보면서 싱싱하게 먹고, 식재료가 점점 비워짐을 확인하게 되면 다시 장보기를 한다.
덜어내는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늘은 기필코 정리해야지’한다면 더 어려워진다. 매일 같이 드나드는 주방에서 쪼끔씩이라도 비움을 실천한다면 머릿속으로 주방용품과 식재료들이 지도처럼 그려지는 날은 반드시 오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주방에서의 고됨은 사라지며 즐거운 일터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온다면 스스로에게 속삭여보자.
“이야, 이거 별 거 아니었잖아. 이로써 나의 수고로움은 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