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먼저 시드는 곳

by 사월

초등학교 3학년, 열 살 시절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대학교 2학년, 스물한 살이 된 지금, 제일 먼저 시들어 죽어가는 곳은 마음이었다.

왜 하필 나일까. 그간 수도 없이 해 온 생각이었다. 셀 수 없이 많고, 하루하루를 빼곡하게 채우는 그 많은 사람들 중 왜 하필 나였을까.


아팠다. 10살이었던 내 배에 직접 바늘을 꽂아 약을 찔러 넣었다. 1형 당뇨였다. 2형 당뇨와 달리, 체내에서 인슐린 분비가 조금도 되지 않는 난치성 질환이다. 내 투병 생활은 2014년, 초등학교 3학년 때시작되었다. 아빠는 피워오던 담배를 끊었다. 손에는 담배 대신 그 당시 유행하던 겨울왕국 스케치북을 들고 병원으로 퇴근했다. 부모님이 출근하신 이후에는 할머니가 매일같이 찾아와 같이 색칠공부를 하고, 스티커를 붙였다. 그 당시에 붙여준 스티커는 아직도 할머니의 휴대폰에 붙어있다. 사실은 좋았을지도 몰랐다. 항상 늦게 오던 엄마아빠는 7시가 되자마자 나를 찾아와 저녁밥을 먹여줬다. 그렇게 조금은 기쁠지도 몰랐을 입원생활이 끝나자 내 삶은 어두워졌다. 아마 내 어두움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식당에 앉아 밥을 먹으려고 해도, 배를 까곤 주사를 꽂아야 했다. 어른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을까? 연신 들려오는 물음표에 나는 대답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후로는 밖에서 음식을 먹기 싫었다. 학교에 돌아갔을 때, 반 친구들이 하나같이 풍선을 가지고 놀았다. 퇴원하기 3일 전, 과학시간에 풍선으로 실험을 하고 받았다고 했다. 부러웠다. 풍선이 갖고 싶었다. 친구가 내 마음을 알았는지, 나에게 츄잉캔디 하나를 나눠줬다. 나는 먹지 못했다.


발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적의 나, 그리고 부모님은 열심히 관리하면 일상생활에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나눠주던 간식들을 전부 거절하고, 토마토와 맛이 옅은 크래커를 가지고 다녔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떡볶이 한 컵도, 슬러시 한 잔도 먹지 않았다. 소풍도, 수학여행도 가지 못하고 혼자 집에서 까끌거리는 현미밥과 나물을 먹었다. 혈당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쓰디쓴 여주와 인삼도 항상 챙겨 먹었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던 것 같다. 미리 말해두자면, 21살이 된 지금은 하나도 소용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뿐인 외동딸, 게다가 투병 중이었기에, 엄마와 아빠는 나를 지키고 싶어 했다. 지금 생각하니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저 과보호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엄마와 아빠는 싸웠다. 화목했던 가정은 사라졌다. 모든 중학생이 그러하기도 하지만, 화목했던 가정을 무너뜨린 부모님이 미워졌다. 부모님보다는 친구가 더 소중했고,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학원이 끝나고 바로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나에게 본인이 퇴근하기 전까지 집에 와있으라고 했고, 그러려면 학원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서둘러 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바로 전화가 와 어디냐며 어서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친구들과 놀고 싶었다. 반항심이 생겼다. 괜히 먹지 말라는 음료수나 간식을 먹고, 친구들과 아파트 단지 안 정자에 모여 수다를 떨며 늦게 귀가했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지며 잠시동안의 일탈도 끝났다. 잠깐동안 맛본 일탈이 너무 달콤했는지,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된 시기의 영향 탓인지, 나는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밤을 새우며 새벽에 밥을 먹고, 활동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중학교3학년 때였다. 관리를 소홀히 한 탓에 나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구토와 탈수현상, 케톤산증이었다.


그렇게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나는 처음 발병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꼈다. 아빠가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줬다. 내 얼굴도 만져주고, 목이 마르다는 말 한마디에 바로 일어나 간호사 분들에게 말을 걸며 어떻게 해야 하냐며 물어보고 다녔다. 엄마와 아빠가 나 때문에 다시 대화를 했다.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그 당시에 잘 말해봤으면 다시 화목하게 살 수 있었을까. 지금도 말해보지 않은 것에 후회한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둘의 사이는 더 안 좋아졌고, 이제는 한 공간에서 잠도 자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니, 친구들은 본격적으로 입시에 뛰어들었다. 나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공부 외에도 신경 쓸 것이 많았기에, 성적도 좋지 못했다. 나는 그나마 내가 가진 능력 중 가장 괜찮은 걸 하기로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해, 나는 입시미술을 시작했다.


처음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력하고, 노력했다. 매일같이 빠지지 않고 학원에 나가 밤 10시에 돌아왔다. 일반적인 고등학생들처럼,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 학원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점점 친구들과의 관계보다 당장 눈앞에 놓인 입시가 중요했다. 그렇게 친구들도 하나둘씩 날 떠나갔다. 나는 학원에 살다시피 했다. 아침에 학원에 가 화장실에 가서 주사를 놓으며 학원에서 밥을 먹고, 밤까지 서서 그림만 그렸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건지 잘하는 친구들과의 격차가 벌어졌다.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노력은 했다. 잘하려는 욕심이 늘어 부담으로 돌아왔다. 매달 긁히는 학원비 영수증을 보며 꼭 보답하고 싶었다. 그 마음도 부담이 되었다. 나는 결국 후반부에 응급실을 출석하듯 다녔다. 학원에서 내 멋대로 되지 않아 생긴 스트레스를 먹는 데에 풀고, 구역질을 했다. 후반부에 멘탈을 잡지 못하고 무너져서, 내가 쌓은 시간도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시험장에서도 저혈당 탓에 중간에 나오고, 휴대폰을 볼 수 없으니 혈당수치가 급격히 변할까 봐 불안해 집중을 못했다. 그렇게 수시원서 6개가 날아갔다. 정시까지 도전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적당히 맞추어 전문대를 입학했다.


그렇게 간 학교에서도 적응을 못했다. 친구들도 다 떠나 위축된 상태였고, 그간 먹는 걸로 풀었던 탓에 살도 많이 쪄 나를 안 좋게 볼까 봐 걱정했다. 처음 입학했던 공예과에서 결국 나는 출석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학사경고를 겨우 면할 학점으로 한 학기를 끝냈다. 나는 다시 일어나고 싶었다. 입시는 실패했지만, 다시 잘 살아보고 싶었다. 모든 게 끝날 것 같고, 끝내고 싶었지만, 마음먹으면 다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전과를 결정하고 시각디자인 학과로 전과했다.


시각 디자인 학과에서 다시 잘해볼 마음이었지만, 공예를 해온 터라 과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만지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배우면서 과제를 내고, 배우면서 발표한 탓에 당연히 좋은 점수는 받지 못했다. 기존에 시각디자인 학과였던 친구들과 너무 크게 비교되었다. 포기하지 않았다. 겨울방학에 학원에 다니고, 2학년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를 다니며 프로그램 공부를 계속했다. 잠을 줄여가며 프로그램을 배우고 교수님들께 질문도 했다. 잘해보려고 했다. 출석을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실력이 좋지 못하기에, 출석점수라도 잘 받아야 했다. 하지만 꼭 마음만 먹으면 마음처럼 안되었다. 독한 감기 탓에 결석을 해버렸다. 하필 그 주에 보강이 있어 중첩된 출석 인정이 안 됐다. 왜 하필 꼭 잘해보려고 하면 이런 일이 벌어질까. 나는 세상을 원망했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고, 나는 휴학을 했다.


휴학을 하고, 나는 더 잘하고 싶었다. 학원을 등록하고, 학원에 나가기 전, 여행도 다녀왔다. 모든 게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열심히 해서 꼭 좋은 실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말했듯이, 꼭 잘해보려고 하면 시련은 찾아온다. 이 시련을 견디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일까? 그러면 난 평생 실패하며 살 것이다. 나는 급격한 무기력감에 잠식되었다.


어떻게 해야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남들처럼 살 수 있을까 밤을 새우며 고민했다. 나는 인내력이 부족한 사람일까. 투병생활을 11년째 하고 있는 지금, 나는 내 병부터 원망했다. 아프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투병 15년 정도가 되면 환자 다수에게서 당뇨망막병증이 발병한다고 한다. 이 병은 실명률이 다소 높다. 11년째인 지금, 이 병이 두려워졌다. 내가 다시 일어서서 열심히 살고, 노력해도, 결국 모든 걸 잃을 날은 필연적으로 또 찾아올 것이다. 그럼 잃을 게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게 덜 슬프지 않을까. 매일 밤 울며 하는 생각이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이 그걸 잃었을 때 오는 상실감이 더 크다. 나는 얼마나 더 잃어야 할까. 친구도, 화목한 가정도, 내 마음에 드는 외모도, 긍정적인 마음도, 다시 일어 설 의지도, 건강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까지. 더 잃을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도 더 잃을 게 있다는 게 절망적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 같다. 잃을 걸 알면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무섭다.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니라, 있었던 걸 잃는 건 얼마나 무서운 건 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한 번이면 충분한데, 앞으로 계속, 몇 번을 더 잃을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내가 병에 걸렸다는 걸 인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왜 하필 나인지 하늘을 원망하고 싶다.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말도, 이제는 인정할 때 되었지 않았냐는 말도. 그럼 뭐 어떻게 하냐는 말도. 너 때문에 이혼 안 하고 살고 있다는 말도. 전부 엄마한테 들은 말이다. 나는 누구를 믿고, 무엇을 인정하고, 누구를,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야 할까. 나 자신도, 엄마도, 아빠도, 이 세상도 전부 밉다. 내가 이런 어두운 새벽에서 다시 아침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버텨가는 하루를 보내면서도, 이 와중에 뒤처지고 있는 나를 참을 수 없다. 언제까지고 부모님의 돈으로 병원비를 내고 약값을 낼 수는 없다. 내가 돈을 벌고, 약을 얻어 살아가야 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 내 옆에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약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병을 가지고도 취업을 하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몸도, 마음도 병든 하루를 오늘도 보낸다. 살아가는 이유를, 살아있는 이유를 다시 찾는 아침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시들어 죽어가는 내 마음의 꽃을 다시 돌보고, 밝은 햇빛을 쬐게 하고, 물도 주어 더 단단한 줄기를 뻗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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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