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어올린 꽃

피지못한 진심

by 마르치아


수국은 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며 감탄하는 그 화려한 빛깔의 부풀어 오른 잎들은 꽃이 아니라 헛꽃, 즉 꽃처럼 보이기 위해 진짜보다 더 화려해진 조각이다. 진짜 꽃은 그 속에 숨어 있다. 작고 수줍고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여린 모습으로. 그러나 바로 그 꽃이 씨를 맺는다. 헛꽃은 그저 누군가를 유인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나는 그런 수국을 바라보며 문득 오래된 관계 하나를 떠올린다.


그 사람 앞에서 나는 언제나 웃고 듣고 맞추는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은 그가 침묵에 잠기면 나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고 그의 피로가 느껴지면 내 피곤함은 뒤로 미뤘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미리 알아두고 싫어하는 음식은 함께 먹지 않았다. 나는 그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누구였는지를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헛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내 마음은 관계의 중심 어딘가에 움츠려 있었다.


보여지지 않기를 바랐고 드러내지 않기로 선택했다. 왜냐하면 진짜 내 마음이 거절당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헛꽃을 피운다. 진심은 깊이 숨기고 감탄받을 모습만 꺼내어 놓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관계에 실패하고 오해하고 헤어진다. 왜일까. 아마도 상대 역시 자기 헛꽃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다른 색깔의 헛꽃만 보고 진짜 마음은 마주하지 못한 채 계절이 바뀌듯 그 관계도 시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비 내리는 오후에 혼자 산책을 하다 수국 군락을 지나게 되었다.


진한 자주빛 청보라 연분홍 그리고 어딘지 말라붙은 흰빛까지. 각기 다른 얼굴을 한 수국들이 고요히 서 있었다.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장 중심에는 너무나 작고 수줍은 그러나 정직한 꽃이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수국은 관계를 말하고 있었다는 걸.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감정은 처음엔 헛꽃에서 비롯된다. 상대를 향해 더 돋보이고 싶은 마음 사랑받고 싶은 욕망 인정받고 싶은 불안감. 그러나 정말로 관계를 열매 맺게 하는 것은 그 모든 것 뒤에 숨어 있던 보여줄까 말까 망설이던 진짜 마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실패한 관계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헛꽃만 보고 떠난 사람과 헛꽃을 피운 채 중심을 꺼내지 못한 나 자신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진짜 마음이 만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수국은 열매를 맺고 관계는 계절을 넘어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이제 수국을 꺾지 않는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그 헛꽃 아래 작고 여린 진심을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안다는 것 그것은 헛꽃을 지나 그 중심까지 걸어 들어가는 일이란 걸 오늘도 잊지 않으려 한다. 사랑은 결국 서로의 중심에 다다르려는 느린 걸음이다. 화려함은 시선을 사로잡지만 진심은 오래 머문다. 수국은 내게 그 진리를 말없이 가르쳐주었다. 그러니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헛꽃 너머에 다가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작은 꽃이 비를 견디고 바람을 건너 결국 열매를 맺는 순간처럼 나 또한 진심으로 무언가를 품을 수 있기를.


그날 나는 우산 한쪽을 접어 들고 조심스레 그 작은 꽃에게 다가갔다. 떨어진 헛꽃 한 장이 손끝을 스칠 때 온몸에 전율이 흐르듯 와닿았다. 화려함만으로는 오래 머물 수 없다는 진실과 진심만으로는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역설이 동시에 나를 관통했다. 그 깨달음은 마치 묵직한 돌이 물밑으로 가라앉듯 내 마음속에 깊이 잠겼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의 시작은 늘 헛꽃이었다. 더 멋져 보이고 싶은 욕망, 인정받고 싶은 불안, 상처받지 않으려는 경계심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복잡한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파장 너머에서 진짜 울림을 만드는 것은 외려 숨겨진 고요한 진심이다. 마치 깊은 호수 바닥의 잔잔한 파동이 잔물결을 이어가듯, 고단한 하루 끝에도 조용히 드러나는 마음이 결국 오래도록 기억된다.


관계가 실패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종종 헛꽃만을 보고 떠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 실패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서로가 헛꽃 너머로 발을 옮기지 못해 마주치지 못했을 뿐이다. 무수한 헛꽃들 사이로 서로의 중심에 걸어 들어가는 일은 애써 외면했던 두려움과 마주하는 일이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순간 비로소 마음의 열매가 익어가고, 관계는 계절을 넘어 단단해진다.


나는 이제 수국을 꺾지 않는다. 멀리서 바라보며 그 밑에 숨겨진 진심을 느끼고 싶다. 사랑이란 서로의 중심까지 느린 걸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긴 여정이다. 화려함이 시선을 빼앗지만 진심만이 오래 머문다. 수국이 말없이 가르쳐준 이 진리 앞에 서서,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헛꽃 너머에 조용히 발을 디뎌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 작은 꽃이 비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씨를 맺는 순간처럼 나 또한 나의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온전히 품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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