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가정 위에서 움직인다. 누군가와의 분쟁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가장 정당한 것으로 여기며 그 신념 속의 '나'를 본능적으로 변호한다. 어쩌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 확증 편향을 진화시켜온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 편향은 세대를 거쳐 때로는 성격으로, 때로는 가르침의 이름으로 조용히 대물림된다.
너무 친한 두 친구가 있다. 한 명은 무신론자였고, 다른 한 명은 성직자였다. 그들은 식당에 마주 앉아 여느 날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며칠 전에 산에서 길을 잃었는데, 날이 저무는 거야." 무신론자 친구가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성직자가 물었다.
"멈췄어.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한 자리에 멈췄어. 서두르다가는 더 깊이 들어갈 것 같았고, 무언가를 믿어보려 해도 그 순간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더라고."
한동안 식탁에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밖에선 저녁이 깊어가고 있었고, 안에서는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의 말을 따라 느릿하게 걸었다.
성직자가 말했다. "그게 기도였을지도 몰라."
무신론자는 웃지도 않았고,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 말의 진심이 어디 있는지 오랜 친구로서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때 처음 기도라는 걸 했어. 신이 만약 계시다면 지금 이 절박한 상황에서 저를 구해주세요. 저는 산짐승의 먹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고 말이야."
성직자의 눈이 반짝였다. "오, 그래? 네가 신을 찾았어? 그래서 신이 움직이셨구나? 너를 살려 내셨어? 그렇다면 너는 왜 신을 아직도 부정해? 지금 살아 있다는 건 신이 너를 살려준 거고, 넌 그럼 믿어야 하잖아?"
무신론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 왜 그래야 해? 그때 마침 마을 주민 두 명이 지나가서 내려가는 길을 알려줘서 무사히 내려왔는데?"
성직자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것도 다 신의 섭리라고."
두 친구는 자라온 배경이 달랐다. 성직자의 집안은 모든 일이 신의 계획 안에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왔고, 무신론자의 집안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두 친구는 서로 다투지 않았다.
관계는 서로를 이해한다는 명제가 따라붙는다. 그렇지만 면밀히 바라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해라는 관점이 거의 확증편향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사람은 타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어떤 사람은 무심하리만큼 무딘 감각으로 반응한다. 인간 관계는 언제나 이 두 입장의 사람이 만나는 일이다. 그래서 관계는 항상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과, 그렇게 하지 못하는 균열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한다.
어떤 이는 단어 하나의 뉘앙스를 오래 곱씹는가 하면, 어떤 이는 말보다 맥락을 우선시한다. 한 사람은 '왜 저 말이 나왔는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은 '그 말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에만 집중한다. 관계는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깊어진다.
이해란, 동의함이 아니라 머무름이다. 상대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그 감정에 재빠르게 해석을 덧입히지 않으며, 그저 머물러 주는 일이다. 침묵과 말 사이, 어긋남과 맞닿음 사이, 그 모호하고 낯선 공간에 머물 수 있어야 우리는 진짜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이해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그 이해가 얼마나 자기 확신에 기초한 것인지 되묻게 된다. "나는 너를 이해해"라는 말은 때때로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결론일 뿐이다. 진정한 이해란 동의함이 아니라 동행함이고, 그 사람의 사고와 감정이 거쳐간 궤도를 조용히 따라 걷는 일일 것이다. 다름을 알아차리고도 그대로 둘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이해의 다른 이름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모든 판단이 기억과 경험, 그리고 감정이라는 필터를 통과해 내려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관찰자라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겪은 불편함과 고통의 그림자를 타인의 말과 행동 위에 덧씌우곤 한다. 이해란, 그 그림자를 걷어내는 연습이다. 타인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의도와 감정을 충분히 숙고하고, 그가 서 있는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일. 이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다.
관계란 결국, 내가 믿는 진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입장과 시선을 만나는 공간이다. 그 공간 안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렌즈로 타인을 바라보고, 그 렌즈는 내가 살아온 시간과 환경, 상처와 치유로 인해 착색되어 있다. 문제는 그 렌즈를 벗지 않은 채 타인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이다. 판단은 종종 그 오만에서 시작되고, 그로 인해 관계는 오해와 상처로 물들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가 보편적이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신념은 언제나 경험의 산물이고, 경험은 늘 개인적이다. 타인의 다름은 종종 우리의 경계와 충돌하며 불쾌함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성장이 시작된다. 나는 왜 저 사람의 말이 불편했는가, 왜 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는가를 돌아보는 순간, 우리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어떤 관계는 오랜 시간을 들여 쌓아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의 오해로 무너진다. 이해하지 못하는 다름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반면, 어떤 관계는 그 다름을 '존중의 이유'로 삼아 한층 더 견고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상대를 바꾸려는 욕망 대신, 스스로의 경계를 조금씩 확장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다름 앞에 머무를 수 있다.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관계를 통해 엎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배운다. 상대를 오해하고, 또 그 오해를 풀어내는 수많은 시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시선에 갇혀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인간의 모든 신념은 확증편향에서 비롯된다. 마치 성선설을 믿음처럼 내면화한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실수나 오해들이 불순물처럼 보인다. 선과 악에 대한 그릇된 신념 하나로 타인의 실수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인간의 착각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누구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있지만, 그것은 다르다는 가정이 있어야만 상대의 실수가 용납된다. 그 다름을 지우고 나의 도덕적 기준과 양심의 잣대로 타인을 바라보는 순간, 판단은 이미 결론을 향해 기울어 있다. 그 판단의 자세와 판단의 때는 시의적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단하고 섣부르게 결론을 내려 오히려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의 단편을 보고 환호하며 다가왔던 관계는 또 다른 단편을 보고 쉽게 떠나가기 마련이다. 우리는 타인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면서 정작 자신 속에 있는 모순은 감추고 싶어 한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관계를 피로하게 만들고, 결국엔 소모시키고 만다.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미루는 것—그것이야말로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나의 확증편향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의 말과 표정과 침묵까지도 판단보다는 관찰로 남겨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때로는 멈추는 일이 가장 분명한 방향일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