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관계를 너무 일찍 단정 짓는다. 관계란 의미는 모든 이별을 겪은 후에 비로소 이름지어진다. 사람의 관계는 이별이라는 예식을 통과해야만 증명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와의 관계를 너무 일찍 이름으로 정의한다. 통계에 의하면 다른 이와 처음 만났을 때 느껴지는 직감은 평균 7분이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상대와의 관계를 상상하며 규정 짓는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타인과 내가 어떤 관계였는지 정확히 이름을 매길 수 있는 시점은 슬프게도, 헤어진 후다. 헤어진 후에야 비로소 관계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난다.
어떤 관계는 도움을 주고받는 건설적인 관계로 알았다가 헤어진 뒤에야 착취와 가스라이팅이 오갔던 관계였음을 깨닫기도 한다. 사랑을 했던 사이인 줄 알았는데, 뒤돌아보니 그것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조종했던 관계였던 것이다.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대부분 이성과 지성을 빌어 상대를 자기가 원하는 상으로 이미지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와 실제의 간극은 이별 이후에야 드러난다. 우리는 그 간극을 견디며, 비로소 관계의 실체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관계의 실체를 정리할 수 있다.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이었고, 함께라 생각했던 순간들이 실은 혼자 짊어졌던 무게였다는 걸, 떠나간 자리에서야 이해하게 된다. 이별에는 방식이 있다. 아무 말 없이 떠나는 사람과, 끝내 한 마디를 더 하고 싶은 사람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을 견디는 일, 그것이 어쩌면 이별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마음속 어떤 이름 하나를 지우지 못한 채, 그 이름이 나에게 남겨준 방식대로 천천히 삶을 정리하고 있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나답게 사랑하고 싶었던, 어쩌면 내가 나에게 건네는 작별의 인사일지도 모른다.
이별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관계의 성적표다. 그 안엔 그동안 외면했던 질문들의 답이 들어 있다. 사람은 떠나는 순간,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가장 명확히 드러낸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이별하는지를 보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별의 태도는 서로가 나눈 시간의 깊이를 되묻는 마지막 질문이다. 그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는가에 따라 그 관계는 다시 쓰이기도 하고, 고요하게 잊히기도 한다. 품격 있는 이별은 단절이 아니라 정리로 끝난다. 마지막까지도 존중을 지킬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랑을 온전히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별하는 순간, 모든 감정과 에너지가 한 점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점을 정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지점에 계속 매여 살게 된다. 이별은 말로 던지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오히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킬 수 있는 여백이 있고, 침묵으로도 전달되는 진심이 있다. 진실은 말로 다 전해지지 않는다. 어떤 진심은 그저 조용히 물러나는 태도 안에 더 깊게 담겨 있을 때도 있다. 진리는 꼭 입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침묵은 그 자체로 가장 큰 지혜이다. 인연을 끊는 순간, 꼭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설명은 관계를 더 얽히게 만들고 마지막 이별의 여운까지 지워버린다.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단지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일이 아니다. 그와 함께 있던 시간 속에서 나를 휘감고 있던 미성숙함, 두려움, 집착과도 함께 작별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정한 단절은 남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 사람이 더 이상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가 내 안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더는 괴롭지도, 슬프지도 않은 조용하고 단단한 해방이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통과의례다.
우리는 그 사람과의 인연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별은 밖으로 먼저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가장 늦게 정돈되는 일이다. 그 사람을 보내고도 한참 동안은 그 사람 안에 살던 나 자신을 서서히 거두어들이는 시간이다. 그래서 가장 아픈 건 사람을 끊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 속의 나를 보내는 일이다. 나는 그 사람보다도, 그때의 내가 너무 그리운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그 사람과 이별을 한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그 사람을 중심으로 내 감정을 순환시키고 있는가? 나는 정말 그 인연을 놓은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내 안에 남긴 그림자를 여전히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를 떠나보낸 것이 그 사람을 향한 작별이었는지, 아니면 그와 함께 있던 ‘그때의 나’를 마침내 놓아주는 일이었는지. 그리고 나는 그 인연을 정말 끊은 것인가? 아니면 그저 감정적으로 밀어낸 것에 불과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