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사람은 자기 자신과 깊은 우정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전에는 남을 통해 나를 보고, 관계를 통해 나의 결을 짚어내고, 타인의 눈빛에 비친 나의 모습을 통해서야 어렴풋이 나를 이해했다면 이제는 조금 다르게, 조금 더 성숙하게, 나라는 존재가 단독으로 서 있는 풍경 자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남이 있어야만 나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나의 본래 모습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 등불 곁에 걸터앉아야 하고, 그 조그마한 불씨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나와 우정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벗을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나와 사귀어야 한다. 일부러 고독해져야 할 때도 있고, 관계의 피로감에서 한 발 물러나야 할 때도 있다. 타인의 기대를 잠시 내려놓고, 이어진 끈을 살포시 풀어놓고, 오롯이 나와 걷고 나와 이야기하고 나와 눈을 맞추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평생을 나와 함께 살아온 이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많은 말을 품고 있었는지, 얼마나 오래 사랑받지 못한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외로움을 피하려고 사람 사이를 부지런히 누비며 살았던 날들 속에서 정작 내가 놓치고 있던 건 나 자신과의 대화였다. 내 안의 목소리는 언제나 나를 부르고 있었는데, 나는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 아파서, 그 속삭임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오십을 넘기며 그 소리를 뒤늦게 듣는 것이다.
벗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모임의 수가 많다고 풍성한 삶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성숙은 외부의 소란보다 내부의 깊이에 달려 있다. 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오히려 더 큰 외로움이 불쑥 찾아오기도 한다. 수많은 말과 웃음 속에서도 나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반면 단 한 사람, 바로 ‘나’와 마주 앉아 잔잔히 숨을 쉬고 있는 그 순간에는, 외롭지 않음이 이상할 만큼 고요하고 충만한 시간이 펼쳐진다. 나는 나를 도외시한 채 누구와 진정한 벗이 될 수 있을까. 남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에는 모질게 굴고, 남에게는 예쁨과 존중을 다 바치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배려도 주지 않은 채 살아온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고는 누군가 나를 귀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섭섭해했던 적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결국 나에게서 시작되는 일이다. 내가 나를 귀하게 대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귀하게 대하겠는가. 나는 나를 손님처럼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장 소중한 손님을 맞이하듯 나를 위해 따뜻한 차를 준비하고, 나를 위해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나를 위해 작고 좋은 선물을 건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화초를 돌보듯이 내 마음을 돌보고, 햇빛이 너무 강하면 살짝 그늘을 만들어주고, 바람이 쌀쌀하면 조용히 블랭킷을 덮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해왔던 모든 섬세한 배려를 이제는 나에게도 돌려주어야 한다.
나를 돌보지 않으면 언젠가는 허무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날이 온다. 수십 년 동안 남들에게 맞추며 산 마음은 어느 순간 비어버린 방처럼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방 안에는 오래 방치된 외로움이 마치 찬물처럼 들어차 있다. 하지만 그 허무는 ‘나’라는 존재가 나에게 돌아오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제라도 나를 돌보라, 나와 친해지라, 나를 귀하게 여기라, 그렇게 말하는 오래된 안내문 같은 것이다. 그 신호를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조금씩 다시 숨을 쉬고, 나라는 존재도 다시 온기를 되찾는다.
나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은 그저 물질적인 것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때로는 나에게 시간을 선물해야 하고, 나에게 쉼을 선물해야 하고, 나에게 사소한 관심을 선물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용서를 선물해야 한다. 오십이 넘어서는 용서해야 할 사람이 많다. 남도 용서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헤매고 다치고 놓쳤던 날들, 후회했던 선택들,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알게 된 것들, 사랑을 잘 받지 못한 어린 날의 나, 사랑을 잘 주지 못했던 어른의 나. 그 모든 시절을 껴안고, 괜찮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나라는 사람은 회복되고 성장한다.
나와 벗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묘한 균형감이 있다. 삶의 무게를 그대로 견디면서도 가볍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따뜻한 빛이 스며 있으며, 말 한마디에도 우정의 결이 흐른다. 그들의 목소리는 들끓지 않고, 마음은 늘 가라앉은 우물처럼 깊고 맑다. 이성은 흐트러지지 않고, 감정은 지나치게 요동치지 않는다. 마치 오랜 시간 잘 길들여진 주전자처럼 뜨겁되 넘치지 않는 온도로 삶을 데운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성숙한 온도의 향기가 난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나 자신과 벗하는 법을 새로이 배워야 한다. 솔직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나의 욕망과 두려움, 나의 꿈과 상처, 나의 결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은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조각들이며, 그 조각들이 하나로 모여 비로소 온전한 내가 된다. 남에게만 잘 보이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걸으려는 마음을 세워야 한다. 그러면 삶은 조금도 허무하지 않다.
나와의 우정은 어쩌면 인생 후반의 가장 큰 선물일지 모른다. 젊을 때는 몰랐던 깊이, 보이지 않던 미세한 빛, 오래된 외로움 속에서 자라나던 작은 용기들, 그 모든 것들이 마침내 나라는 존재에게 돌아온다. 나는 나와 함께 늙어가고, 나와 함께 깨어나고, 나와 함께 하루를 살아간다. 이 관계는 그 어떤 외부의 관계보다 오래가고, 흔들리지 않고, 배신하지 않는다. 나와 사귀는 일은 결국 나의 영혼과 화해하는 일이며, 나의 인생과 손을 잡는 일이다.
오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세상은 나에게 많은 요구를 하지만, 이제는 그 요구에 앞서 내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나는 나에게 평화를 요구하고, 안정된 숨을 요구하고, 고요한 밤을 요구하고, 나를 나답게 하는 선택을 요구해야 한다. 그 요구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건강한 존엄이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마음의 장치다.
우리는 나와 벗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단단해지고, 외롭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 이 길 위에서 나는 조금 더 나답게, 조금 더 단단하게 늙어갈 수 있다. 세월이 지나도 빛이 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귀하게 여긴 사람이다. 그리고 그 귀함은 누가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손끝에서 시작된다. 나를 대접하고, 나를 아끼고,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 쌓여 결국 한 사람의 품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