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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 묻은 손가락의 기적

by 김경훈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런던의 빈민가, 희미한 가스등 불빛 아래 작은 필기실 '문장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남의 글을 밤새도록 베껴 쓰는 젊은 필경사 '윌리엄'이 살고 있었죠.

그리고 그의 발치에는 잉크 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숨을 고르는 리트리버 탱고가 있었습니다.


필경사의 일은 고단하고 단조로웠습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검은 잉크가 배어들고, 어깨는 늘 무거웠죠.

주변 친구들은 윌리엄을 동정하며 말했습니다.

"겨우 남의 글이나 베끼는 하찮은 노동에 왜 그렇게 목숨을 거나? 대충 하고 쉬엄쉬엄하게나."


하지만 윌리엄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는 깃펜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를 음악처럼 즐겼고,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문장을 옮겼습니다.

탱고는 윌리엄의 깃펜 끝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잠시 펜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그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습니다.


"윌리엄, 당신의 손가락에 묻은 저 잉크 얼룩은 단순한 노동의 흔적이 아니에요.

당신은 지금 남의 문장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들 사이의 여백에 당신만의 성실함이라는 각주를 채워 넣고 있는걸요."


윌리엄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탱고, 가끔은 내 일이 너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 때가 있어.

과연 이 일 끝에 무엇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탱고는 윌리엄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며 부드럽게 속삭였습니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어요.

그 일을 대하는 하찮은 마음만 있을 뿐이죠.

날마다 주어지는 내 몫의 일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 사소한 반복이 당신의 영혼을 단단하게 근육질로 만들어줄 거예요.

당신은 지금 필경사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미래에 당신이 직접 써 내려갈 위대한 문장들을 위한 체력을 기르고 있는 거예요."


탱고는 윌리엄이 정성껏 베껴 쓴 원고 뭉치를 가리키며 덧붙였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고 정성을 쏟는 사람에게는, 어느새 그 일 자체가 거대한 계단이 되어줄 날이 올 거예요.

당신이 이 잉크 냄새를 사랑하며 견뎌온 시간들이, 머지않아 당신을 상상도 못한 곳으로 데려다줄 거니까요."


세월이 흘러, 밤마다 남의 책을 베끼던 그 청년은 마침내 자신의 첫 소설 '파리대왕'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수백만 명의 독자가 그의 문장에 열광했고, 1983년 그는 세계 최고의 영예인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 말했지만, 탱고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런던의 컴컴한 필기실에서 잉크 묻은 손으로 매일매일 쌓아 올린 '사소한 최선'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요.


탱고는 다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습니다.

위대한 성취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앞에 놓인 지루하고 단순한 일들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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