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김까밀 2
반 배정 결과가 나오고 새 담임 선생님을 만났을 때, 난 울고 말았다. 1학년 말에 같이 다녔던 친구들과 모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친구를 사귀어야 한 다는 생각에 골이 아팠다. 새로운 학년에 어떻게 적응할까 걱정 많았는데.. 다행히 그게 무색해질 정도로 좋은 친구들과 다니게 됐다. 모두 심성이 곱고 따뜻한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 중 몇은 지금까지도 나의 가장 좋은 친구로 남아있다.
물론 중간에도, 최근에도 틀어진 친구들이 있다. 멀어진 이유는 대부분 내 우울증에 기인한 것이라 할 말이 없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틀어진 후에 아쉽고 잠깐은 미웠던 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도 나는 이 친구들이 좋은 사람임에는 틀림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이야 어쩔 순 없어도, 내가 힘들었던 시절의 버팀목들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가 더 성숙한 어른으로 그들을 마주하길 바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1학년 초에 같이 다녔던 친구 중 한 명, P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것이다. 물론 P의 사과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그 무리에서 틀어진 후, 남은 3명이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2학년 초에 셋 중에 P가 무리에서 나가게 되었다. A 말고 나머지 두 명과 같은 반이 되었던 나는 그 두 명을 대하는 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도 참 불편했다. 하필 또 반장을 했던지라. 대놓고 척을 질 수도, 완전히 살갑게 굴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와중에 P가 미안하다고, 함께 다닐 수 없겠냐고 하니... 얘를 잘 달래줘야겠다고 하면서도 조금은 속상했다.
예술계 학교 음악과에는 '향상 음악회'라는 것이 있다. 주마다 번갈아가며 학생들이 연주를 하는 건데, 그때 부모님들이 오신다. 당연히 P의 어머니도 오셨고... 나는 P와 사이가 어떻든 간에, 일단 어른을 보면 인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꼬박꼬박 인사를 했었다. 그런데 P의 어머니가 안 받아 주시더라. 사람을 쌩깐다는 게 이런 거구나, 씁쓸했다. 그 이후에 P의 어머니가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했을 때 난 그 일을 떠올렸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나? P와 다시 잘 지내게 된 이후로 살가워진 어머니를 보면서, 인간은 참 알 수 없다고 느꼈다.
1학년 말 때 P가 우리 집에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다시 이야기를 잘해보자는 전화였다. 딱 거기까지만 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그다음 문장이 문제였다. 네가 우리를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잖아. 잘 지내보자는 말이 반갑다가도, 그 말을 듣고 나서는 마음이 한없이 무너졌다. 나는 가까스로 울음을 참으며 물었다. 너희는 조금이라도 내 생각을 하고 이런 전화를 하는 거냐고. 그 말엔 대답이 없었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럼에도 P를 다시 친구로 받아들였던 이유는, 1학년 때 나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얘도 나와 비슷하게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지금은 후회한다. 그냥 매몰차게 그때 내쳤으면 내 마음이 덜 힘들었을 것 같았다. 감히 누가 누구를 연민하고 앉았나. 지금 봐도 제일 불쌍한 년은 난데.
아직까지 내 책장에는 당시 P가 줬던 긴 편지가 있다. P는 작년에 생일 선물을 못 챙겨준 게 미안하다며, 몇 가지 과자와 함께 그 편지를 나에게 줬다. 살면서 본 편지지 중에 가장 크기가 컸다. 그때는 '미안하다'라는 말과 정성스럽게 쓴 글씨들이 그렇게 감동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사과받는 일도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20대 초반에 P와 멀어지게 되고, 다시 그 편지를 읽었는데 참... 처음부터 끝까지 변명과 남 탓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A가 부추긴 탓에 그랬다느니, 어쨌다느니.. 미안하다는 말 사이사이에 남겨진 표현들이 잠깐 나를 갉아먹기도 했다. 너는 끝끝내 네 책임에서 최선을 다해 회피했구나.
스물한 살 겨울이었던가? P에게서 갑자기 E와 만나지 않겠냐고 물었다. E는 앞서 말한 세 명 중 한 명이다. 이윽고 E에게서 오랜만에 만나고 싶다는 카톡이 왔다. 몇 년 만에 온 카톡을 보고 한참을 고민했다. 만나면 좀 내 마음이 나아질까? 도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길래. 궁금해서 P의 자취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택시에서 내리고, 저 멀리서 두 녀석이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잠깐 1학년 때, 참 좋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래,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생기는구나. 나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자취방에서 고기를 먹고, 셋이 마주 보며 앉았는데 E가 이야길 꺼냈다. 그땐 자기가 너무 어렸다고. 그래 어렸지.. '너만 어렸을까?' 되묻고 싶어 졌지만 포기했다. 그런데 그 말 이후에 P의 입에서 나온 말이 가관이었다. 우리가 잘못했지. 나는 까밀이한테 1년 내내 사과했어. 그러는 거다. 1년 내내 사과는 무슨.. 엄밀히 따지자면 그 편지 이후에 미안한 구석은 없어 보였다. 나는 가끔씩, 그때의 일을 걔가 잊어버린 것 같아서 속상할 때가 있었다. 적어도 나한테 미안하고 고마웠으면, 내가 힘들게 너와 이어준 친구들에게 조금 더 잘했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아휴, 지금 와서 생각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암튼 그렇다.
그래도 나는 P와 끝까지 잘 지내고 싶었다. 어쨌든 P는 재밌는 구석이 많은 친구였고 성격이 잘 맞기도 했다. 우리는 같은 해에 대학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고, P는 숨만 쉬어도 웃긴 놈이었다. P도 대학에 붙고, 나도 대학에 붙었을 때 너무 기뻤다. 그토록 좋은 순간이 없었는데.. 어느 날 한 친구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됐다. P가, "까밀이는 조금 쉽게 대학에 간 것 같아서 좀 그렇다"라고 했다고... 웬만하면 안 믿고 싶었는데, 그 친구도 굳이 거짓말을 할 친구는 아니었다. 그 한 문장이 내게 커다란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P는 이제 나에게서는 먼 사람이다. 가끔가다 소식이 들려오면, 그래, 살아있긴 하는구나. 또 이상한 놈팡이를 만나진 않는다니? 이 정도 반응은 한다. 그래, 마음 준 시절이 있어서 가끔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나도 걔가 트라우마고, 일련의 사건으로 틀어진 이후는 나도 걔의 트라우마가 되어 있을 것 같다. 뭐 이젠 알 바 아니지만! 흥. 어쨌든... 아휴. 잘 지내길 바란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나한테 미안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