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김까밀 3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이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일단 처음에, 까밀이는 가르치면 잘 알아들어요. 애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나고 나서 다들 이 말씀을 하신다.
'얘는 왜 이렇게 노력을 안 해요?'
공부 안 하는 건 대부분의 학생들이 겪는 일이니 패스하고. 연습에 대해 얘기해 보자. 나는 고등학교 때 연습을 더럽게 안 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레슨 때 선생님이 '어제 악기 케이스는 열었니?'라고 물으실 정도. 학교 연습실에 매일 남았지만, 나의 제대로 된 연습은 연습실 마감 10분 전에 시작됐다. 이상하게 그때.. 뭐라고 해야 하나. '삘'이 차오른달까? 그때 하는 연습이 제일 기똥찼다. 10분 전에는 다들 갈 준비를 하는데, 그제야 겨우 악기를 켜고 있는 나를 보며 친구들을 말했다. 저 계집애 집 가야 하는데 또 지랄이네.
물론 나도 연습을 많이 한 때도 있다.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였나. 2학기 실기 등수가 정말 맘에 들지 않았고, 그때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방학 동안 하루에 8시간 이상 연습했다. 지금 생각해도 난 그때 제대로 미쳤던 것 같다. 8시간? 이제 내가 8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건 유튜브 보는 것 밖엔 없다. 어쩔 땐 11시간을 할 때도 있어서, 그때 엄마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습 그만해라'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 선생님은 소문난 호랑이 선생님이셨는데, 약 한 달? 정도는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지 않을 정도였다.
중학교 때까지는 하는 척이라도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 중반이 되고 나서부턴 그냥 패션 바이올린 전공생이었다. 그냥 수업 때문에 들고 다녔던 듯. 어느 날엔, 내가 너무 연습을 안 하자 음악과 부장선생님께서 연습 노트를 써오라고 하셨다. 몇 시간 했는지 쓴 다음에 엄마한테 사인 받아오라고. 그때 잠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사인을 해주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노라는 눈빛으로 엄마에게 공책을 내밀었던 것 같다.
나는 매년 부모님과 바이올린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퉜다. 당시 내 꿈은 가수였다. (남들이 들으면 웃는 거 아냐?) 음악은 좋았지만 바이올린을 하고 싶진 않았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한 탓에, 다들 내 꿈이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 때 교실 게시판에 각자의 사진과 꿈에 대해서 적혀 있었는데, 선생님이 멋대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적어놓으셔서 아주 화가 났던 기억이 있다. 생활기록부에 꿈을 적을 때 꼭 가수라고 적고 싶었는데... 그놈의 입시 때문에 그렇게 못 적은 것이 천추의 한이다.
바이올린 때문에 가장 스트레스받았던 건, '경쟁'에 관해서였다. 중학교 때 선생님들이 실기 1등부터 꼴등까지 순서대로 적힌 종이를 문 앞에 붙여놨다. 아, 내 위치가 저기쯤이구나. 확실히 보일 때의 그 굴욕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난 누구 밑이고, 누구의 위며... 그게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순위'라는 게 나 자신을 굉장히 좀먹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어느 위치에 있지 않으면 무시당할까 봐 무섭기도 했다. 그런 것 치고는 연습을 안 했지만... 암튼. 점점 내가 실기등수에 심하게 집착하는 것을 보면서, 나 스스로의 모습이 꽤 질렸었다.
노래고 나발이고.. 대학을 위해 꾸역꾸역 해야 하는 것이 제대로 지쳤을 때 즈음, 일이 터졌다. 레슨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버스를 탔는데, 버스 기사님이 내가 다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 덕분에 활 케이스가 문에 끼었고, 활이 부러졌다. 우지끈, 하는 느낌에 버스에서 조심스럽게 활 케이스를 열었던 때가 떠오른다. 부러져 있는 활을 보며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내 활은 다른 전공생 친구들이 쓰는 것에 비해 싼 편이었지만, 그래도... 한두 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골라주신 활이었어서 의미가 남다른 애였다. 그 활에 붙인 이름이 '활순이'였는데... 나는 활도 부러지고 멘탈도 함께 부러졌다.
그때 도와주시겠다는 분들이 참 많았다. 선생님들, 악기사 사장님, 친척들, 친구들...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분들이다. 활을 입시 때까지 부담되지 않은 가격 선에서 빌려줄 테니, 끝까지 해보라고 하시던 분도 계셨다. 그랬는데 난 결국 악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악기로 인해 그 누구도 미워하고 싶지 않았고, 내 사진을 갉아먹기도 싫었다. 바이올린 하는 김까밀이 아니라 그냥 김까밀. 노래를 하고 싶은 김까밀.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다.
수시 원서 접수 기간일 때쯤 나는 엄마, 동생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바닷가 근처 숙소였는데, 바닥에 앉아서 이슬 톡톡 한 캔을 홀짝홀짝 마셨다. 그때 마음이 살면서 제일 편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유독 제주도를 더 좋아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때 느꼈던 바람, 공기, 눈에 한아름 담기던 노을이 지고 있는 바다. 아직도 좋은 향기가 나는 기억 중에 하나다.
그냥 경험 삼아서, 친구들끼리 모여서 점심이나 먹으려고 간 거긴 하지만 수능을 보긴 했다.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어느 대학에 정시 원서도 넣긴 했는데, 시험장엔 가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께서 어떻게든 입시 보게 하려고 많이 신경 써주셨는데... 마음에 보답하지 못해서 항상 죄송한 마음이다. 그래도 어쨌든 지금은 음대생이니까, 그 마음을 좀 내려놔도 되려나? 하하하.
고등학교 때 신세를 졌던 선생님들께 연락을 드리고 싶은데, 아직 용기가 안 나서 못하고 있다. 그렇게 개난리를 쳐놓고, 지금 상태가 변변치 못 한 게 늘 마음에 걸려서다. 그때, 내게 유달리 따뜻하고 다정했던 어른들이 너무 그리울 때가 많다. 그리고 다짐하게 만든다. 나도 그들만큼 좋은 어른이 되어야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별로 자신이 없긴 하다.
열아홉은 보통 피어오르는 나이라고들 하지 않나. 나는 그때 한 번 나를 꺾어주었다. 나는 다 끝장내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은 내가 '가지치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더 튼튼한 가지, 더 튼튼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내 인생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나는 새 가지가 자라나길 기다리는 중이라고 생각하련다.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