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결석계 07화

폭풍전야

by 까밀

지휘 전공에 대한 생각은 어렸을 때부터 희미하게 존재했다. 시립 교향악단의 지휘자 선생님들을 보면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 '아우라' 같은 게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어른으로서 너무 멋있어 보인다 생각했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시각 장애인 오케스트라에 관련한 동영상을 봤을 때다. 두 눈 멀쩡한 나도 힘든데, 악보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연주라니. 음악은 소리를 이용하는 예술인데, 그 진가가 거기서 발휘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지휘자 선생님은 더 멋있게 보였던 것 같다.


내 방에는 두 개의 지휘봉이 있다. 하나는 인터넷에서 산, 수업 때 쓰기 위한 지휘봉. 나머지 하나는 중학교 때 선생님이 내게 주신 거다.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지휘봉 손잡이에 선생님의 이니셜을 적어서 주셨다. 이젠 오래되어서 글씨는 희미해졌지만,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물건이다. 그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설마 내가 지휘 전공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사람 일은 정말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같다.


입시를 보겠다고 마음먹은 때가 9월 말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3개월 반 정도였다. 그 짧은 시간 안에 해야 할 입시 과제들이 아주 많았다. 그럼에도 하려고 한 건,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오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대학교 지휘 전공은 오케스트라와 합창으로 나누어진다. 할 일이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합창 지휘의 경우 학부 생활 내내 노래를 정말 많이 부르게 된다. 이런 점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졌다.


나는 학교 필기시험이나 실기시험을 준비할 때, 벼락치기로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벼락도 그냥 벼락이 아니다. 완전 날벼락 수준이다. 실기는 그래도 오래 준비하지만 필기 같은 경우는... 선생님들께 심심한 사과를 전해야 할 정도다. 솔직히 말하면 공부를 하면 대단한 수준. 그런데 합창지휘 입시는 진짜.. 내가 했던 벼락치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차라리 성악이나 작곡, 피아노를 전공했으면 적어도 한 가지 정도는 수월했을 텐데. 하필 그 많은 악기 중에 바이올린을 해버려선, 전부다 아예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성악은 차라리 나았다. 문제는 피아노와 시창청음, 화성학이었는데... 내 입시를 도와줬던 친구가 나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 '작곡과 혹한기 훈련 하는 것 같아' 진짜 맞는 말인 듯. 그때 하루에 몇 시간을 잤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일주일 중 레슨이 없는 날이 없었고, 어떨 때는 하루에 레슨이 4개였다. 새벽에 화성학 문제를 풀다가 트위터(현 X)에 죽고 싶다고 얼마나 하소연을 했는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서 그런 걸까, 친구인 P가 내가 비교적 쉽게 학교에 들어갔다고 했다는 게 더 화가 난 것 같다.


시험 날, 아침 일찍엔 이론 시험을 보고 오후에는 실기 시험을 보는 형태였다. 아침에 본 이론 시험은, 어떻게 답을 다 적긴 했는데 뭔가 망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험장을 나오면서 시X이 바로 나왔는데, 어쩌면 누가 들었을지도...^_^. 실기시험 때는 반주 악보를 차에다 놓고 와서, 아빠가 학교 언덕을 '달려라 하니'에 빙의해서 뛰어다녔다. 게다가 들어가기 전에 울었고. 일단 최선을 다해서 보긴 했는데, 준비했던 시간이 짧다 보니... 아마 이번에는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웬걸. 붙었다. '축하합니다' 문구를 보자마자 오열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발표 확인 당시 양 옆에 날 도와준 친구들이 있었는데, 다 같이 얼싸안고 울었다. 나도 고생했지만 친구들도 곁에서 많이 도와주고 고생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주... 어우, 눈물 날 것 같아. 부모님부터 나, 친구들, 선생님들까지... 애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진짜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그만큼 결과가 나온 것 같아서 너무 행복했다.


나는 그날 아빠의 반응이 제일 인상 깊게 남았다. 아빠가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엉엉 울었다. 내 딸, 잘했다... 잘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내 합격 소식이 온 동네에 퍼졌다....^^. 편의점을 갔는데 아르바이트생이 나보고 합격 축하한다고... 아빠가 그렇게 자랑을 하고 다녔다고. 아니 누가 보면 대통령이라도 된 줄 알겠어, 싶었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니까 한 번 정도 눈감아주기로 했다.


그렇게 '합격하고 행복하게 지냈습니다'라고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인생은 높게 올라가면 추락하게 되어있는지.

이제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하지만, 언젠가는 당당하게 알리고 싶었다.


다음번에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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