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일의 아침. 설 명절이라 할머니 댁에 가기로 했다.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나와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명절에, 모르는 번호, 전화 세 통? 이상하다 싶었지만 핸드폰을 다시 덮어두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부재중으로 찍힌 번호와 같았다. 왠지 받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받았다. 여보세요? 어떤 남자의 인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XX대 음악대학인데요.
합격이 취소될 수 있어 전화드렸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남자에게 물었다. 그 이후에 한 말은 요약하자면 이렇다. 입시 때 부른 과제곡에 문제가 있다. 소명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보겠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우리 집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내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는데,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내 곡은 분명히 과제곡에 부합했지만, 그걸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입시를 도와준 친구들, 선생님과 함께 밤을 새 가며 책을 찾아보고 논문을 뒤졌다. 이렇게 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내내 불안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말 죽고 싶었지만, 죽어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었다.
학교를 몇 차례 오가며 소명 절차가 이루어졌다. 기대와 설레는 마음으로 다녀야 했을 교정이 꼭 얼룩이 묻은 것 같았다. 많이 울었다. 장기가 다 타들어갈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삶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거지? 울먹거리다 꺽꺽대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했다. 저는 잘못해서 부르지 않았어요. 저는 정당하게 시험을 봤고 합격했어요.
다행히 그 시간을 잘 버텨내고, 오해가 풀려서 합격을 유지하게 됐다. 우리 가족은 잘 됐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겨우 끼니를 챙겼다. 딱딱하고 오래된 밥이었지만 꼭꼭 씹어 삼켰다. 우리가 감내했던 시간을 부숴내는 것처럼. 먹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지옥 같던 일주일이 끝났다.
나는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학교에 다니는 게 꼭, 내 사이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아요. 답답하고, 숨이 막혀요.
일은 잘 해결 됐지만 워낙 충격이 컸던 탓인지, 나는 학교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가 어려웠다. 대중교통을 타거나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공황발작이 올라왔고,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어려웠다. 마음을 내려놓을 곳 하나 없었다. 매일 어떻게 죽어야 할지 고민했다. 계속 살아가는 게 의미가 있나?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면서 어영부영 한 학기를 마쳤다.
여름 방학 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결국 정신과를 찾게 됐다. 나날이 상태가 나빠져서 휴학계를 냈다. 그땐 몰랐다. 내가 4년이나 휴학을 하게 될 줄은. 처음에는 1년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복학할 상태가 아니었지만, 질질 끌게 될까 봐 처음엔 마음먹은 대로 1년 만에 복학했다. 쉬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첫 학기보다 생활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도 꿋꿋하게 잘 버텨보려고 했는데…
어느 날, 후배와 함께 점심을 먹게 됐다. 처음으로 후배와 밥을 먹는 거라서 아주 기쁘고 좋았다. 그런데 대뜸 후배가 이런 소리를 했다.
선배네 학번에 곡 잘 못 부르고 들어온 사람이 있대요.
그 얘기에 나는 수긍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어서, 그냥 그래? 난 잘 모르겠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지금 얘가 날 떠보려고 하는 건지,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간신히 웃으며 식사 시간을 마무리했지만, 그 이후에 또 다른 지옥이 시작됐다. 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오해하면 어떡하지? 이걸 알고 날 비난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떡하지? 결국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학기 도중에 다시 휴학계를 냈다. 이후로 한 차례 다시 복학했지만, 학기 도중에 또 포기하게 됐다. 그런 상태로 4년이 흘렀고, 나는 입학한 지 5년 만에 2학년이 되었다.
나는 이 일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숨기고 싶었다. 말하기 좋은 일도 아니었을뿐더러, 또 다른 오해를 사게 될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말하게 된 까닭은… 더 이상 내가 이 일로 괴로워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 일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 너무 오랜 시간 아팠다. 이젠 그만 아프고 싶어요. 그리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마음의 상처는 몸의 상처와는 다르게 아주 오랜 시간을 아파해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상처가 그렇듯, 내 마음의 상처도 언젠가 아물 거라고 믿고 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또 견디고 아파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잘 다독여가며 나아가고 싶다. 이 글을 읽은 분들도 덤덤히 나를 위로하고 응원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그리고 잘 지켜봐 주시기를. 그런 분들로 인해 내가 하루를 더 살아갈 수 있음을 알아주시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