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농도
화장터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이제 곧 이 땅을 떠나야 할 영혼들의 한숨과 미련의 무게만큼 일분일초를 빈틈없이 꽉 채워 그렇게 꾹꾹 눌러 담겨 시간이 흐르고 있다. 여자 성인이 화장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시간 30분쯤. 몸에 좋다는 거 열심히 먹으며 살찌우고, 키 키워 놓고, 피부에 좋다는 화장품들 바르면서 유지해온 얼굴 그리고 죽을 듯이 공부해서 채워놓은 머리인데, 그런 모든 인생이 부질없이 90분이라는 요즘 영화의 상영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그냥 가루로 흘러가고 만다. 화장터의 복도는 회색빛이다. 검은색 옷들과 핏기 없는 하얀 울음소리 그리고 기계 소리가 섞인 그런 회색빛. 복도 끝에 있는 큰 창문으로 햇볕이 들긴 하나, 그 햇볕조차 차갑고 시리다. 난 화장터 복도를 서성이며, 아까부터 1시 10분에서 도저히 움직이지 않은 시계를 쳐다보고 있다. 복도를 울리는 울음소리 속에서 스산한 공기를 느끼며 멍하니 시계만 바라보고 있다.
화장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누군가의 화장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휴게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난 거기에 앉아 있지도, 그렇다고 할머니를 화장하는 곳, 16번이라는 번호가 붙어있는 곳, 엄마가 아직 울고 있는 곳에도 가지 못한 채 그 중간인 복도에서 그냥 서성이고 있다. 휴게 공간에는 할머니의 지인들 및 교회 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 그리고 화장하는 곳 근처에는 우리 가족과 친척들이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기억하며 있었다. 마치 고인과 관련된 사람들의 친분에 등급이 있어 더 슬픈 사람들은 화장 장소 근처 쪽으로 조금 덜 슬픈 사람들은 휴게 공간에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암튼 지난 이틀간 잠을 제대로 못 잤기에 몽롱한 기분이 드는 것 일수도 있지만, 여기저기 섞여서 들리는 울음소리들과 끊임없이 뭔가를 갈고 있는 기계 소리로, 물론 그 뭔가가 우리가 사랑했던 누군가임을 완벽하게 느끼며, 점점 몽롱해져 가는 정신을 겨우 붙들고 있을 때, 갑자기 작은 고모부가 오시더니 소곤거리며 말을 걸었다.
“이 색깔이 더 낫니, 아님 저거?”
아까부터 뭘 열심히 보시고 계셨는데, 곧 바꿀 차를 보고 계셨나 보다. 째려보는 고모의 시선을 느끼며 내 대답은 듣지 못한 채 다른 복도 끝으로 쫓기듯 그렇게 사라지셨다. 무의식적으로 저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자마자 자신도 아차 하신듯했다. 화장터에서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긴 하다. 일분 일 초도 더디게 지나가는 이곳에서, 잠시의 지루함을 전혀 견디지 못하는 작은 고모부에겐 슬프긴 하되 정말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 같단 생각을 해봤다. 어차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이왕이면 현명하게 사용하시는 그 인생의 효율성에 대해 이해를 했다. 아니 그냥 아주 잠시만 그렇게 이해를 해드렸다. 그리고 작은 고모부와 우리 할머니의 사이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아내의 엄마. 아이들의 외할머니. 일 년에 많아야 두 번 뵙는 장모님.
이틀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모든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장례식장에 와주신 모든 분들은 진심으로 가슴 아파해 주셨고, 할머니를 잃은 슬픔을 함께 나눴다. 장례식장에서 다 함께 나눈 슬픔은 의심할 것 없는 순도 100%이었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장례식이나 다른 이의 슬픈 일을 접할 때면 그때에 흘린 눈물이나 가슴 아픔, 그리고 한동안 먹먹함은 가짜가 아닌 진짜 슬픔 혹은 애도가 맞다. 하지만 이게 냉정하게도 나의 일과 남의 일로 혹은 직접 경험과 간접경험으로 나뉘면, 슬픔의 진실성은 100%이지만 그 슬픔이 내 삶에 미치는 농도뿐 만 아니라 슬픔의 길이가 달라지는 것 같다. 지금 나에게 직접적인 슬픔과 간접적인 슬픔 사이의 정도를 나누는 눈금이 그려져 있는 표가 있다고 상상해 본다면, 나에게 우리 할머니의 죽음은 가장 직접적인 슬픔 자리에 표시되어 있을 것이고, 작은 고모부에게는 첫 번째보다는 몇 칸 아래에 있을 수 있다. 또, 나는 얼마 후 아침에 일어나 딴 일을 고민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 엄마는 어쩌면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고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암튼 슬픔의 길이는, 즉 슬픈 일에 대한 애도의 시간은, 매우 주관적이고 어떠한 개인주의보다도 더 철저하게 나와 얼마나 관련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에서 작가는 슬픔과 아픔은 동시에 겪더라도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에 것이 작다고 했다. 여러 가지 슬픔이 동시에 일어날지라도, 한 개의 큰 슬픔이 나타나면 그 다른 슬픔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깊은 동의를 한다. 이 말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슬픔의 크기는 자기 자신의 기준에서 매우 주관적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
참 많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난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무엇이 최악이었노라고 기억하기 조차 힘들 만큼 점점 상상 그 이상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런 꿈에서나 일어날 법한 비극들이 가끔씩 일어나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파해줄 마음이 더욱 그리고 오래 있었다면, 요즘엔 내가 어제 어떤 일로 아파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슬픔이란 감정에 무뎌져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슬프지만 그러하다.
저 멀리 보이는 전광판에, 화장 완료라는 단어가 할머니 이름 옆에 떴다. 시계를 보니 그렇게 더디었던 90분이란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따뜻해진 할머니를 가슴에 품고, 회색빛의 스산한 복도를 지나 밖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