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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Sep 21. 2020

빈집

시간이 멈춰버린 곳 

주인이 없는 집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방문 일정을 알려드리니 할아버지는 문을 잠그지 않고 나갈 테니 편하게 왔다 가라고 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진다. 잠긴 문조차도 두세 번 확인하는 나에겐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문을 잠글 필요가 없다는 건 훔쳐 갈 것이 없거나 주변에 훔쳐 갈 사람이 없다는 건가. 아님 나를 너무 믿는 건가. 암튼 묘한 긴장감 느끼며 할아버지 집 앞에 섰다. 


그곳은 서울에서 두 시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좁고 굽은 시골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다 잘못 들어왔나 싶을 때쯤 집 한 채가 나왔다. 차 시동이 꺼지니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만 들린다.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대문은 없고 문패만 걸려있었는데 이 문패조차도 낡고 더러워져 적힌 이름을 읽어내긴 어려웠고 그 옆에 있는 우편함에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은 편지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계세요?” 혹여나 바뀐 일정으로 집에 계실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서 크게 목소리를 내어본다. 고요함 속에 혹시 모를 대답을 기다리며 낡은 헝겊으로 꽁꽁 싸매져 있는 수도꼭지를 바라본다. 헝겊에 쌓인 묵은 먼지는 그곳에 묶인 채 멈춘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 전에 본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본 마을이 생각났다. 원전 사고 이후로 그대로 멈춰버린 곳. 햇빛이 비쳐도 차갑고 시린 도시. 이곳도 체르노빌처럼 과거 어느 시점에서 멈춰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마당 군데군데 먼지 쌓인 쓰레기들과 적막함만이 남아있는 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내 모습이 매우 이질적으로 느끼며 문 앞으로 다가선다.


다시 한번 “어르신 계세요?”. 허락을 맡았지만 남의 집에 들어가려니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몸이 삐죽 댄다. 철컥하고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아야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매우 자연스럽게 문이 열린다. 역시나 주인 없는 빈집에 들어가는 건 이상하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행동 하나하나 조심스러워 신발도 가지런히 벗어 두고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선다. 들어서자 부엌이 제일 먼저 보였다. 식탁 위엔 미처 냉장고에 넣지 못한 반찬들과 약봉지, 설거지통에 놓인 밥그릇 하나 그 위에 올려진 수저 한 벌을 보며 할아버지의 아침을 상상해본다. 


체크리스트와 사진기를 들고 본격적으로 집안을 둘러본다. 할아버지 방에는 싱글 사이즈 매트가 하나 있고 머리맡에는 약봉지들, 침대 맞은편에는 작은 텔레비전이 하나 놓여있다. 침대 위엔 머리 부분이 움푹 팬 베개와 몸 하나 빠져나간 것 같은 이불속 작은 구멍에 시선이 머문다. 벽에는 그 흔하디 흔한 사진 하나 없이 단지 몇 가지 외투와 바지가 걸려있다. 보통 다른 집을 방문하다 보면 벽과 천장의 경계쯤에 사진들이 몇 장은 있곤 했는데 여긴 아무것도 없다. 벽에 걸린 옷들로 작고 아담하신 할아버지 모습을 짐작해볼 뿐이었다.


남향집답게 거실은 겨울 햇살이 가득했다. 모든 공사도 잘 끝나서 거실은 더욱 따뜻하고 아늑해 보여 사진에 찍힌 거실의 모습은 공사가 매우 잘 된 결과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따뜻한 햇살에도 불구하고 시계 초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함에 몸이 움츠러들고 있었다. 남의 집에 혼자라는 상황 때문일 수도 있고 지나가는 차 소리나 옆집 사람 소리 등 주변에서조차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집안을 둘러볼수록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혼자'라는 모습 때문일지도. 집 밖에서 느꼈던 멈춰버린 삶의 모습이 쌓인 먼지와 함께 집안 곳곳에 스며있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낯선 물건 하나. 거실 벽에 큰 초록색 리본이 달린 챙이 넓은 여름 모자 하나를 발견했다. 오늘 이 집에 들어와서 본 물건 중에 타인의 빈 집에서 움직이고 있는 나만큼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 모자 사진을 찍어본다. 뷰 파인더엔 먼지가 많이 쌓인 모자 하나가 보인다. 


할아버지는 다 둘러볼 때까지 나타나지 않으셨다. 집을 나서기 전, 안을 다시 살펴본다. 누군가의 흔적을 남기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두고 온 물건은 없는지 모든 것이 내가 들어오기 전과 같은지를 꼼꼼하게 점검해본다. 찜찜하지만 문도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잠그지 않고 잘 닫아둔다. 밖으로 나오니 그새 날씨가 더 쌀쌀해졌다. 그늘을 피해 수돗가 근처로 내린 햇살을 맞으며 잠시 몸을 녹여본다. 이내 옷 틈으로 들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에 옷을 다시 여미고 마당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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