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교훈과 자녀의 ‘나 다움'
이해는 전통과 해석의 지평이 충돌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부모는 인생에서 낭떠러지의 위험을 안다. 어느 때는 미끄러지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가까스로 피해 가기도 하면서 그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얻은 교훈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자녀들이 다치거나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좀 더 편하고, 안전하길 소망하는 마음으로부터 발원한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은 부모들의 소망이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응을 보인다. 이를 귀찮아하거나 심지어 반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마치 자신들이 스스로의 삶에서 낭떠러지 앞에 서거나, 아찔한 경험에 노출되거나, 비바람에 넘어질 위험을 마주하기를 갈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교훈은 과연 타인에게 전달되는 것이 가능할까?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능존재‘로 보았다. 누구도 타인의 가능성을 대신 살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 앞에 서서 스스로 결정하거나 책임을 지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다양하고 폭넓은 부모의 경험이라도 그것은 ’부모의 가능성‘일 뿐 자녀는 그와 다른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러한 삶을 갈구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전달해주려고 하는 교훈으로부터 시작된 갈등이 일방적인 명령으로부터 비롯된다기보다는 ’삶을 이해하는 방식의 다름‘에서 발생되는 긴장일 것이다.
경험은 그 속성상 말로써만 전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언제나 ’체험‘으로서 만 온전한 모습을 갖춘다. 부모가 넘어졌던 그 돌부리에 걸려 똑같이 넘어져 본 후에야 그 모양을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음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으로서 스스로의 지혜를 축적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다.
철학자 가다머가 말하듯 ’전통과 해석의 지평이 충돌할 때 이해가 일어난다.‘ 부모와 자녀의 삶은 서로 이해의 지평이 다르다. 그러므로 자녀들 스스로 체험하는 그 ’충돌‘의 소용돌이 속에 서라 야만 전통으로서의 부모의 교훈을 자신의 삶 속으로 가져와 새로이 해석할 수 있게 되고 진정 삶의 지혜로서 이해가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부모가 전달하고픈 삶의 교훈은 가공된 상태로 일방적인 지식의 형태로는 주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삶의 진실에 이를 수 있도록 ’고요한 여백‘을 남기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녀들이 ’책임의 선택‘을 하도록 하고 그 선택에 담긴 무게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충돌의 허용과 그로 인한 해석에 대한 여백으로서의 ’틈‘을 마련해 주는 것. 그것이 부모들이 전해줄 교훈의 참된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