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학생으로
주변에서 항상 듣는 질문이 있다.
"박사 왜 하는 거야?"
학부 시절, 막연히 ‘연구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랩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의 석사 진학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석사를 졸업하며 다짐했다.
“죽어도 박사는 안 한다.”
졸업 후, 어느 연구원 인턴으로 들어갔다.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내가 상상한 ‘연구원의 삶’과 비슷했고, 여유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가장 낮은 학력은 석사였다.
대부분이 박사 이상이었고, 정규직은 모두 박사였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려면 박사 학위가 필요하구나.’
마치 자격증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내가 못할 이유도 없겠는데?’ 하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리고 요즘 석사까지 하는 사람은 너무 많다.
부모님 세대에는 많지 않았던 4년제 졸업장이
이제는 당연시되며 경쟁력이 떨어진 것처럼,
석사 학위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거라 생각했다.
이 분야에서는 이미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어릴 때 박사과정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 했고, 바로 컨택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학교 랩실 풀타임 박사과정
연구원 학연생 박사과정
나는 조금 더 고생하더라도 ‘깔끔하게 풀타임 박사’를 하는 게 정석 코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턴을 마치고 다시 학생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나고 보니, 꼭 그 연구원이 아니더라도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됐다.
석사 때는 사기업 연구원, 정출연 연구원, 연구사 정도가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사를 하다 보니,
교수직, 강사직, 자문위원, 집필 활동 등 더 많은 선택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이렇게 10년간의 랩실 생활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중 하나다.
물론 석사 졸업 후 경력을 쌓아도 가능하겠지만,
솔직히 말해 석사에서 멈췄다면 이런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것 같다.
왜일까 생각해 보면, 결국 ‘경험’ 덕분이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으로 실험을 설계하고, 보고서와 논문을 쓰고,
그 과정을 거쳐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경험들이 나의 자신감이 되었다.
물론 실패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러면 안 되는구나’를 알려주는 반면교사가 되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만들었다.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신체적·정신적 건강 악화
예민해지는 성격
친구들이 커리어를 쌓는 동안 실험실에 묶여 있음
불안정한 인건비
특히 주변 친구들과 비교될 때가 힘들다.
친구들은 입사하고, 승진하고, 돈을 모으며 결혼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나는 아직 학생이고, 졸업 시기도 불확실하다.
이 길로 들어선 순간,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길'은 나에게 대입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이 정도는 이루어야지' 이런 사회통념 같은 비교대상(?)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만의 길을 가면 된다는 생각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내 상황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 혹은 없을 수도 있다는 부분이 힘들기도 하다.
그래도 이런 건 박사과정을 시작한 순간부터 각오한 부분이다
오히려 신체 건강 문제가 크다.
박사 졸업한 선배들을 보면 과정 중 한 번 이상 크게 아픈 경험이 있었다.
반려질병을 얻게 되더라.
슬프게도 나 역시 질병을 얻었다.
박사를 시작하려는 지인에게는 꼭 말한다.
“운동하면서 건강 챙겨라.”
박사 과정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장기전이다.
체력이 곧 정신력이다.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버티기 힘들다.
석사 때처럼 내일 없는 사람처럼 무리하지 말고,
오래 버틸 수 있는 리듬으로 스스로를 조절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박사과정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치열한 고민 끝에 지금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미래를 위한 투자를 시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이른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물박사’가 바로 그런 경우다.
물론 “박사라면 반드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라는 절대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자기 연구에 대한 책임감은 분명 기준이 될 수 있다.
그 책임감을 회피하거나 주변에 기대어 학위를 마치는 태도가 결국 물박사를 만든다고 본다.
특히 국내에서는 “선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 대신 일을 해주거나, 최소한의 노력만 해도 학위가 굴러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한국에는 물박사가 많다”는, 편견 같지만 편견 아닌 인식이 퍼져 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해외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국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한 줄의 데이터라도 직접 쌓고, 밤새 문장을 붙잡으며 아등바등 버티는 게 당연한 일상이라고 한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박사과정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그런 ‘물박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결국 박사란 지식의 양보다 태도의 무게로 평가받는다.
책임 없는 학위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박사를 시작할지 고민 중이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길은 쉽지 않다. 하지만 너를 성장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체력이 곧 생존이다.
그러면 언젠가 박사 학위가 주어질 것이다.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