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의 시작, 문서부터
랩실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실험과 논문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연구의 시작은 언제나 문서였다.
수많은 제안서와 보고서, 회의 속에서, 우리는 실험 이전의 싸움을 먼저 치러야 했다.
실험을 하려면 그전에 경제적인 기반이 필요하다.
실험 재료, 장비, 경비, 인건비까지—모든 것을 충당하려면 무엇보다 ‘돈’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연구에 있어서 사람과 기술만큼 중요한 요소는 ‘돈’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 돈은 과제를 따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과제의 펀딩은 보통 다음과 같은 경로를 통해 이뤄진다:
한국연구재단
국가기관 및 산하 연구소
사기업 및 민간기관
이 외에도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지만, 현실적으로 위 기관들에 연구계획서를 제출하고 평가받는 과정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런 연구를 할 테니 당신들의 돈을 여기에 써달라"라고 설득하는 문서를 써야 한다.
연구계획서의 시작
물론 완전히 자율주제인 경우도 있지만(주로 연구재단에 해당됨),
대부분은 지원 기관이 제시하는 연구주제 틀이 존재한다.
이 틀은 보통 RFP(Request For Proposal) 형태로 공고된다.
연구자는 이 RFP에 맞춰 제한된 예산 내에서 무엇을 어떻게 연구할지 구체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한글 문서로 연구계획서를 작성한 뒤, 필요한 경우 PPT 발표를 통해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된다.
(발표 없이 서면 심사만 진행되는 경우도 많다.)
연구계획서 작성, 누구의 몫인가?
대학원생 입장에서 이 작업을 직접 경험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석사와 박사를 서로 다른 학교에서 했는데, 두 곳 모두 대학원생이 계획서 작성을 실질적으로 담당해야 했다.
물론, 실제 기여도는 교수님의 스타일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처음에는 "계획서는 대학원생이 쓰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나중에 이 작업을 전적으로 교수님이나 일부 박사만 담당하는 연구실도 많다는 것을 알고 꽤 충격을 받았다.
과제를 따내는 데 중요한 것들
그동안 여러 연구계획서를 준비하며, 과제 수주에 중요한 조건은 다음 세 가지라고 느꼈다:
교수님의 발표력 및 임기응변 능력
교수진의 연구 실적과 해당 분야 연관성
적절하고 전략적인 연구비 계상
당연 해당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실험능력과 배경지식이 있다는 것은 기본 전제이기 때문에 세 가지에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이외에 물론 문서의 가독성이나 자료 디자인도 중요하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건 교수님의 발표력과 태도로 대부분 커버가 된다. 그게 안 되는 경우는... 정말 어렵다(경험상).
자연계 실험실에서의 문서 감각이 왜 필요한지,
왜 학생이 이 부분에서 발전할 수밖에 없는지를 추후 따로 다뤄보려 한다.
연구비 계상
그리고 중요한 항목 중 하나, 예산.
단순히 숫자를 맞추는 작업이 아니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어떤 장비를 쓰고, 어떤 시약을 사고, 어떤 인력을 어떻게 투입할지를 설계하는 일이다.
결국 연구비 계상은 연구의 구조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이 계상 작업이 현실과 동떨어지면,
비현실적인 항목으로 간주되어 심사에서 감점되거나
연구가 시작된 뒤 예산이 부족해 난관에 부딪히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비목별로 예산을 옮기는 작업은 생각보다 번거롭다.
게다가 연구비 횡령 등의 이슈 이후, 연구비 관련 행정은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구성을 잘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 일 역시,
대학원생이 맡는 연구실도 있고, 교수님이 직접 챙기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석사 시절, "내가 왜 이것까지 해야 하지?" 싶었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연구비가 어떻게 구성되고 돌아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과제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걸 느낀다.
현실의 예외와 ‘내정자’ 문제
물론, 과제 선정 과정에서 ‘내정자’가 있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이건 암묵적인 룰이기도 하고, 굳이 여기서 길게 이야기하진 않겠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과제 수주의 전략과 조건은 그러한 ‘내정’이 없는 경우를 전제로 한다.
이제 연구계획서가 통과되면,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착수보고, 월례회의, 연차보고, 최종보고...
그리고 연구보다 더 연구 같지 않은 행정의 싸움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