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감정을 살리는 AI 현지화 전략
며칠 전, 한 글로벌 게임사에서 런칭을 준비 중인 게임 사업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글로벌 런칭 날짜는 얼마 안 남았는데, 번역 스크립트를 어제 겨우 넘겨받았어요... 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을 듣고 걱정 말라며 웃었지만, 속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게임의 글로벌 런칭이 디폴트값이 되어버린 지금, 현지화 (Localization)는 단순한 번역을 넘어섰습니다.
게임 내 감정, 세계관, 캐릭터 간의 상생, 플레이 경험까지 모두 옮겨야 하는 복잡하고 중요한 작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AI는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랑블루 판타지"로 유명한 일본의 DMM 그룹은 GDC 2025에서 "Algomatic"을 통해 게임 현지화 시스템에 ‘AI 에이전트’를 도입한 사례를 공유했습니다.
해당 AI는 단순히 문장을 단어 단위로 바꾸는 기존 번역기와는 다르게 작동합니다.
기존의 기계 번역은 보통 ‘단어 대응표’를 기반으로 번역합니다. 예를 들어, “도와주세요”는 “Help me”, “안녕”은 “Hi” 같은 식이죠. 해당 방식은 빠르지만, 맥락을 읽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연출이나 감정이 담긴 장면에서 ‘의도’, 즉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한 장면에서는 대사의 첫 글자들을 조합하면 “도와주세요”라는 숨겨진 메시지가 됩니다.
기존 번역기는 이걸 그냥 지나쳐버리지만, DMM의 AI는 그걸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Help me”로 번역해 냈습니다. 이건 단순히 문장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장면의 목적을 이해하고 대응한 것입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DMM이 도입한 AI는 LLM 기반이기 때문에 사람처럼 앞뒤 문맥, 세계관, 장면의 분위기를 모두 고려해 번역합니다. AI가 단순히 단어를 바꾸는 게 아니라, ‘왜 이 말이 여기서 나왔는가?’를 같이 이해하며, 시나리오 작가처럼 상황을 읽고, 의미를 해석합니다.
즉, AI는 반복적인 문장을 빠르게 번역하고, 인간 번역가는 감정이나 뉘앙스를 다듬는 ‘연출가’ 역할을 합니다. AI와 사람이 협업해 감정과 맥락을 옮기는 ‘공동 창작’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겁니다.
국내 대표 게임사인 NCSOFT는 올해 진행된 AI 콘퍼런스에서 "리니지 W" 등 글로벌 타이틀에서 단순히 텍스트 번역을 넘어 ‘경험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자체 개발한 VARCO LLM을 통해 글로벌 서버에서 실시간 다국어 번역을 지원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 유저가 한국어로 채팅하면, 일본 유저는 그것을 일본어로 자연스럽게 받아보게 됩니다. 기술적으로는 서버 내 실시간 언어 변환이지만, 경험적으로는 마치 ‘하나의 언어로 대화하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줍니다. 게임 내 은어나 줄임말도 자연스럽게 번역되도록 훈련된 점도 인상적입니다.
또한, 음성 현지화 기술 - TTS와 보이스 클로닝 기술은 캐릭터의 목소리를 다양한 언어로, 감정과 억양까지 포함해 자연스럽게 생성합니다. 그리고, 대사에 맞춰 립싱크와 표정, 몸짓까지 자동으로 연동되어 감정까지 번역하는 효과를 보여줍니다.
더 흥미로운 지점은 문화적 민감성까지 고려한다는 점입니다.
"리니지 W"에 등장하는 보스 몬스터 ‘바포메트’는 이슬람권 유저를 고려해 영문 버전에서는 ‘카프리커스’라는 이름으로 변경한다거나, 추석 같은 명절은 단순히 ‘Korean Thanksgiving’으로 바꾸지 않고, ‘Chuseok’이라는 원어 그대로 표기해 현지 유저의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즉, NC의 AI 현지화는 번역의 기술이 아니라, 브랜드 경험의 일관성을 유지해 주는 경험의 설계에 가깝습니다.
AI 현지화는 단순한 ‘빠른 번역’을 넘어 게임 플레이 자체에 직접적인 변화를 선사하는 진화된 기술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AI를 활용해 해당 기능을 구현하게 한 두 가지 핵심 기술 포인트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맥 기반 실시간 번역
“이 장면에서 적이 죽었을 때 ‘Finish him!’과 ‘I’m sorry.’ 중 뭐가 더 어울릴까?”
문맥 기반 번역은 ‘이 대사가 등장한 이유’와 ‘앞뒤 상황’을 함께 고려해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 캐릭터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면, 그에 어울리는 말투와 표현을 선택하게 됩니다.
게임 유저에게 캐릭터의 대사는 단순히 단어가 아니라, 감정과 상황을 의미합니다. 특히 RPG, 어드벤처 게임처럼 감정선이 중요한 장르에서 이러한 문맥 기반 번역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듭니다.
다국어 음성 자동화와 립싱크 통합
“이 대사를 중국어로 바꾸는 건 어렵지 않지만, 다시 녹음하고 애니메이션까지 맞추려면 며칠이 걸려요.”
중국에서 게임 사업을 할 때 종종 들었던 말입니다.
기존에는 텍스트 번역 후, 성우 녹음을 하고, 그 음성에 맞춰 캐릭터의 입모양(립싱크), 표정, 몸짓을 조정하는 작업을 각각 따로 진행해야 했습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었죠.
하지만, 이제는 AI가 대사를 다국어로 합성하고, 캐릭터의 입 모양과 표정까지 자동으로 맞춰줍니다. 한 문장을 수정해도 모든 과정이 한 번에 갱신되기 때문에, 빠른 업데이트와 실시간 대응이 가능해졌습니다.
게임은 읽는 콘텐츠가 아니라 ‘보는 감정 콘텐츠’입니다. 만약, 유저가 '왜 이 캐릭터는 갑자기 표정이 안 맞지?'라고 느끼면, 몰입감이 깨집니다. 또한, 이 부분은 글로벌 유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제공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AI 현지화 기술은 단지 번역의 속도나 비용을 줄이는 게 아니라, “게임 유저가 느끼는 감정과 경험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설계하고 전달하느냐”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게임 장르마다 AI 현지화의 접근 방식은 다릅니다. 이는 AI가 플레이 경험을 어떻게 조율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각 장르별 주요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RPG: 감정과 몰입을 다루는 번역
선택지 분기, 감정선, NPC 반응 등에서 맥락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AI는 플레이어 성향과 세계관 흐름을 읽고 감정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조율합니다.
전략 게임: 정보와 일관성 중심의 번역
병과, 전술, 역사적 배경 등 정교한 용어의 정확성과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AI는 반복되는 개념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각국 표현 차이를 반영합니다.
퍼즐·시뮬레이션: 속도와 반복 최적화
텍스트가 짧고 반복적인 장르에서 AI는 일관성과 속도를 동시에 충족해야 합니다. UI 메시지, 점수판, 팝업 텍스트 등에서 자동화 효과가 두드러집니다.
어드벤처·비주얼노벨: 정서와 대화의 번역
감정 표현과 대사 뉘앙스가 중요한 장르입니다. AI는 초벌 번역을 담당하고, 후편집을 통해 유머·은유·문화 코드를 다듬는 협업 구조가 필요합니다.
MMO·MOBA: 실시간 연결 중심의 번역
전 세계 플레이어가 동시에 소통하는 환경에서, AI는 실시간 번역과 다국어 운영 지원을 담당합니다. 공지, 채팅, 이벤트 정보까지 속도와 정확성이 모두 요구됩니다.
AI 현지화의 본질은 ‘이질감을 없애는 기술’입니다.
현지화는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유저 경험과 감정을 동일하게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각 게임의 장르에 따라 번역의 초점이 다르며, AI는 각 장르의 플레이 문법에 맞춰 진행되어야 합니다.
AI 현지화는 이제 실시간 번역, 감정 음성, 문화 번역까지 통합된 접근을 통해 브랜드 경험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경험 설계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AI 현지화의 남은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합니다.
* 위 내용은 저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문에서 언급된 기업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