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팔할이 질투이다.

브런치북 <맨정신엔 말 못할 개똥철학>

by 늘보나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질투이다.”

서정주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라는 구절을 빌려와 바꿔 쓴 문장이다.
질투는 늘 다른 얼굴로 내 곁에 있었다.

어릴 적,
부모님은 똑똑하지만 내성적인 동생의 리더십을 기르겠다며
청소년 단체에 가입시켜 캠프를 보냈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는 동생의 뒷모습을
나는 문간에 서서 바라봤다.
사실은 내가 먼저
그 단체에 가입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했었다.
하지만 가정형편상 나는 가입할 수 없었고,
주인을 잃은 신청서는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동생을 배웅한 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을 열어

오래 접힌 채 눌려 있던 신청서를 꺼내
책상 아래로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신청서가 잘게 잘게 다 찢길 때까지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단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에 남은 흉터에
함부로 손대지 않는 법을 배웠다.


학창 시절,
4년을 매일 붙어 다닌 친구가 있었다.
시험 기간만 되면 그 친구는 늘 웃으며 투덜댔다.
이번엔 망했다,
아무것도 계획대로 못 끝냈다,
밤새 놀기만 했다는 말.
나는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같은 편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다른 친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애는 매일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시험 때마다 그런 말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단짝 친구는 이상하게도 말과 달리 성적이 늘 좋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과장도, 악의도 없는 사실처럼 들렸다.
그날 이후

그 친구의 말과 행동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진짜 공부를 못했어”라는 말이

더는 가볍게 들리지 않았고,
웃으며 던진 농담에도

어딘가 계산된 여백이 느껴졌다.
우리는 여전히 붙어 다녔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감정에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걸
조심스럽게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집 안의 와이파이가 갑자기 끊겼다.

영상은 멈추고 검색도 되지 않았다.
익숙하던 속도가 사라지자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초조함으로 변해갔다.
이것저것 눌러보고

선을 다시 꽂아보아도
연결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고

불편함만 조용히 부풀어 올랐다.
남편에게 물으면 금방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이런 걸 잘 다뤘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남편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방에서 놀고 있던 아이를 불렀다.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에게
무엇이 문제일 것 같은지,

선을 다시 꽂아보면 어떨지
아는 대로 질문을 던졌다.
아이는 잠시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빠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그냥.”

하고 대답했다.

그건 남편에게 부탁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상대가 더 잘한다는 걸 알면서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기로 한 선택.

같이 사는 두 어른 사이에도

끝까지 혼자 해결해 내고픈 일들은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질투는 늘 나와 함께

형태를 바꿔가며 자랐다.

서러움이 되었다가,

거리감이 되었다가,

어떤 순간에는 선택이 되기도 했다.

질투는 나를 무너뜨리기도 했고,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그 감정을 없애는 것보다

어떻게 데리고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질투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질투를

내가 어디로 끌고 갔는지였다.



다음 주 목요일 7시에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