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 직장
5년 만에 선우는 하숙집 만수아저씨를 만났다.
만수아저씨는 착하지만 상처도 잘 받고 방황도 많이 하던 선우에게 대학시절 내내 잔소리꾼이었다. 고객으로서가 아닌 친자식처럼 연애, 진로, 선후배... 문제들을 상담해 주었다.
선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서도 무슨 고민이 있을 때마다 수구초심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만수아저씨를 떠올리곤 했다. 만나고 싶었던 순간이야 헤아릴 수 없지만 만남으로 이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새로 칠한 듯 깔끔한 초록색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입구 쪽에 ‘상담실’이란 문구가 쓰여 있는 방을 지나치려는 순간 발길이 멈췄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이 누군가의 얘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한 눈에도 만수아저씨였다. 이제는 아예 하숙방 하나를 희생해 전용상담실을 차려놓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선우는 아저씨를 와락 끌어안았다. 선우가 끌어안은 손을 놓으면서 양손으로 아저씨 어깨를 톡톡 치더니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저씨, 진짜 반갑네요. 이게 몇 년 만이에요!”
자기 아버지보다 두 살이나 위인 만수에게 대하는 태도 치고는 너무나 형편없는 예의였지만 만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웬일이야? 잘 있었지? 얼굴이 하나도 안 변했네. 너는 어쩜 몇 년을 도시에 살아도 시골티를 못 벗냐? 허긴 웰빙시대에 시골친화적인 삶이 건강에 좋기는 하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농담 좋아하시는 건 여전하군요! 히히.”
선우는 멋쩍어하면서도 반가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정말 반갑다 선우야! 우리 시원한 생맥주 한잔 할까?”
“500 두 잔 하고요, 안주는... 육포 주세요.”
두 사람은 맥주가 나오자마자 한 잔을 게눈 감추듯이 비우고, 한잔씩 더 시켰다. 급하게 마신 터라 선우도 만수도 약간의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저씨, 좋아 보이네요.”
선우가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진지한 눈빛과 음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 좋아.”
대답은 기분 좋게 했지만 선우의 야릇한 표정은 만수의 가슴 한편에 꺼림칙한 무언가를 슬며시 떨구어 놓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그냥.........”
“왜. 무슨 일인데?”
만수가 재촉해서 물었다. 소위 SKY라는 명문대 철학과를 나온 그의 직감은 늘 날카로웠다.
“그냥 사는 게 재미가 없어서요.”
만수는 선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니 일 하는 게 재미없네요”
선우는 만수의 눈을 애써 피했다. 만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재미없으면 그만둬야지.”
“네?”
“재미없다며? 재미없는 거 해봐야 너만 손해지.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고. 회사는 회사대로 손해고...”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집 앞에 길이 새로 났는데 가게자리가 많이 났어. 알아보니까 세도 그렇게 비싸지 않더라.”
선우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너 학교 다닐 때 삼겹살집 하고 싶다고 그랬잖아. 이 쪽엔 삼겹살집이 없는데 이참에 나랑 삼겹살집이나 한 번 해 볼래? 자리는 진짜 좋은데.”
만수는 선우를 조롱하듯 얘기를 계속했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돼. 내가 60 평생 살면서 싫어하는 거 해서 성공하는 사람 못 봤으니까.”
“그래서. 그만두라고요?”
선우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씹고 있던 육포가 튀어나왔다.
“그래. 그만둔다며?”
“제가 언제 그만둔다고 그랬어요. 일 하는 게 재미없다고 했죠.”
“재미없으니까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줄 알았지. 그럼 관두지 않고 계속 다닌다고?”
“아. 그렇다니깐요. 제가 어떻게 해서 들어간 회산데.... 뻔히 아시면서.”
그 옛날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처럼 선우의 말투가 불퉁거렸다. 만수는 선우에게서 최소한 지금의 회사를 계속 다닐 의향이 있음을 일단 확인했다. 아니 다닐 의향을 유도했을지도 모른다.
“알지. 거기 들어간다고 토익학원을 몇 년을 다녔냐? 공부하기 힘들다고 나한테 전화께나 했었지.”
“그랬었죠.”
선우의 기분은 좀 풀어진 듯했다.
“내 기억으로 너 거기 들어갈 때 경쟁률이 100대 1이 넘었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100대 1이라뇨. 106대 1이었어요.”
선우의 어깨가 으쓱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어요. 말 그대로 지옥이었죠. 지옥.”
만수도 회상에 젖었다.
“그래. 지난 일이지만 너 정말 고생 많이 했어. 회사에 입사했다는 합격통지받았을 때 아저씨한테 전화했던 거 기억나냐?”
“그럼요. 부모님 다음으로 아저씨한테 전화했었는데요.”
“뛰듯이 기뻐했었지.”
선우는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 달라던 넌 끝내 울먹이기도 했었지.... 기억나지?”
“별 걸 다 기억하시네. 창피하게. 어쨌든 그땐 그랬었죠.”
선우는 잠시 회상에 잠기는가 싶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강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근데 입사해 보니까 말만 대기업이지 정말 형편없더라고요. 주 4.5일제도 격주로 하다가 겨우 지난달에서야 본격적으로 시행하고 있고, 교통비라고 해야 쥐꼬리만큼 주고, 1년에 정기휴가도 20일 밖에 안되고...”
선우는 이런 식의 불만을 끊임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만수가 듣기엔 복에 겨운 소리일 뿐이었다. 선우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려 만수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선우야! 너 육이오,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 이런 게 뭘 뜻하는지 알지?”
“그거야 뭐... 요즘 정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사회현실을 비유한 말들 아닌가요?”
“그래 맞아, 그럼 이유기라는 말은 들어봤어?”
“아뇨, 무슨 뜻인데요?”
선우의 눈에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나이 스물여섯에 취직도 못하고 엄마 젖이나 먹고 산다는 의미래.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들어진 20대들의 취업걱정을 빗대서 한 말이지. 한마디로 20대의 취업준비생들이 육이오,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니들은 나올 걱정이나 하지, 우리는 입사도 못해봤어’라고 한다는 거야.”
만약 병사와 노동자들이 고되다고 불평한다면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 벌을 주어라.
-파스칼-
선우는 조금 전 자신의 발언에 대해 약간은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틈을 타 만수가 급히 말을 이어갔다.
“요즘 직장인들은 직장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고마움도 잘 모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더라.”
“왜요? 그게 무슨 뜻이죠?”
“청계천 복원공사가 시작될 무렵이었지. 30년간을 청계천 부근에서 근무하시던 어르신과 인터뷰한 내용이 방송됐었어. 혹시 봤니?”
“아뇨. 못 봤어요.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옛날에는 먹고살기 힘들어서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해도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일했다는...”
만수는 선우의 눈치를 살짝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도 감사히 일 했다는 그런... 내용이었어.”
선우는 공감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기예요. 벌써 30년도 더 된 얘기잖아요.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아저씨도 어쩔 수 없는 구식이에요. 아저씨는 트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선우가 빈정거렸다.
“물론 시대가 변한 지금 직장인이 그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힘든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며 열심히 일했던 그네들의 마음가짐을 현대의 직장인들도 가끔씩은 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
선우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뭘... 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건지...”
“우리가 운이 좋아 이 시대에 나고 자라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글쎄요. 우리가 고생을 해야 했겠죠.”
“그래. 우리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을 우리가 대신해야 했겠지.”
선우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그분들이 온갖 시련과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건설해 놓은 결과물이 지금의 대한민국이잖아.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이 없었다면 21세기가 아니라 22세기에 우리가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국가기반을 닦기 위한 고생은 우리들의 몫일 거야. 지금 21세기 후진국의 국민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해야 하고, 이 시대를 건설해 준 어르신들께도 감사해야 돼.”
만수는 건배를 한 후 다시 톤을 높였다.
“그리고 그때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냐.”
“네. 그렇군요...”
긍정은 했지만 선우는 말끝을 흐렸다.
“내가 한 말은 맨날 이것도 감사, 저것도 감사, 감사, 감사하라는 말이 아니야. 직장생활이 짜증 나고 지긋지긋하게 싫어질 때 훨씬 더 힘들었을 60, 70년대와 그 시절을 일군 어르신들을 상상해 보면 뭔가의 메시지를 얻을 거라는 뜻이야.”
“정신상태가 흐트러졌을 때 옛날을 떠올리면서 한 번씩 정신무장의 주사를 맞으라는 거군요.”
선우는 이제야 흐릿하나마 이야기의 줄기를 잡아가는 듯했다.
“그래. 나태한 정신을 깨워줄 일종의 동기부여 의식인거지.”
만수와 선우는 번갈아가며 화장실에 다녀왔다. 호프를 유난히 좋아하시는 만수는 500 한 잔을 더 시켰다. 선우는 육포를 우적우적 맛있게 씹고 있었다.
“선우는 뭐 좋아하냐?”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네?”
“취미라든가... 기호라든가... 뭐 아무거나”
“좋아하는 거야 많지요. 스키 타는 것도 좋아하고, 선글라스도, 배스킨라빈스도, 햄버거도, 섹시한 여자, 모자는 50개도 더 있고...”
만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다.
“근데. 왜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에이. 그럴 리가요. 아저씨는 의미 없는 말을 거의 안 해요. 옛날부터요. 이번에도 그럴걸요?”
“선우도 도인이 다 됐구나.”
“그럼요. 아저씨 덕택에 많이 배웠죠. 빨리요.”
“선우는 직장에 애정이 있다고 생각하냐? 아니면 없다고 생각하냐?”
“글쎄요. 생각해보지 않은 거라....”
“그래? 그럼 애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냐? 애정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냐?”
“그야 물론 있어야겠죠.”
“왜?”
“왜라뇨?”
“왜 애정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냐고?”
“아.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요? 아저씨 또 이상한 말씀 하시네.”
선우가 약간 흥분한 듯 말했다.
“애정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면서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네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 아니냐?”
“참∼ 나∼”
“그렇잖아.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애정을 갖게 되는 이유가 돈이 많다든지, 예쁘다든지, 몸매가 잘 빠졌다든지, 교양이 많다든지, 애교가 넘친다든지, 음식을 잘한다든지, 착하다든지... 뭐 이런 이유가 있은 후에 애정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거 아냐? 내 여자친구니까 아무 이유 없이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이론이 더 이상한 거 아니냔 말이야?”
“그게. 그 말이지. 뭐가 달라요.”
“아냐. 달라. 애정을 갖는 이유가 명확해야 여자친구도 오래 사귈 수 있는 거잖아. 결혼까지 갈 수도 있고 말이야. 그냥 어쩌다 만나서 호감이 가는 것 같으니까 사귀다 보면 별일 아닌 걸로도 헤어지게 되고 그러잖아.”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만수가 말하는 내용의 흐름은 맞는 것 같았다. 선우도 그런 만남을 가진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순간 뭔가가 선우의 뇌리를 스쳐갔다.
“혹시, 제가 직장에 애정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만수는 말 대신 선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런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럼. 이유를 말해봐!”
호통을 치는 듯한 만수의 말에 선우는 움찔 놀랬다.
“.........”
“애정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말해봐.”
이번엔 조금 부드러운 다그침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내가 볼 땐 넌 내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아니에요. 다 기억하고 있어요.”
“물론 기억하고 있겠지.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이야기니까. 하지만 기억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네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부족해 보인단 말이야. 그래가지고는 하루만 지나도 지금껏 들은 얘기의 약발은 떨어지고 말아.”
선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만수의 얘기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지금까지 만수의 얘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긍정의 표현을 전하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자기의 상황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한 마디로 그냥 흘러가는 얘기로 들어버렸다. 그리고 만수는 그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만수에게 미안한 맘이 들었다.
“선우야.”
참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네가 나를 오랜만에 찾아왔지?”
“네....”
“뭔가 이유가 있었을 테고.”
“...... 그렇죠.”
“.........”
만수는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사이 선우는 다짐했다. ‘그래. 내가 뭔가 도움을 얻으러 왔잖아.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내 인생의 진정한 멘토에게! 그것도 무료로! 지금부터라도 경청하자. 저 능청스러운 아저씨는 아마도 지금 나에게 반성의 시간을 그리고 새로운 맘가짐의 시간을 의도적으로 주고 있는 걸 꺼야’라고 생각하던 순간 만수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