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과 신뢰
벌써 전역한 지 3주가 됐네요. 군대에서의 기억이 점점 오래된 기억처럼 느껴집니다. 눈 앞에 없으면 며칠 전까지 동고동락했던 사람들도 잘 생각이 안나더군요. 제가 갓 상병 달았을 때 전역했던 선임이 있었습니다. 이등병 2개월과 일병 5개월(조기진급)까지 합치면, 7개월 동안이나 같이 살았는데요. 전역하고 일주일 뒤에는 원래 없던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 선임이 전역하고도 선임 20명 정도가 전역했습니다. 저희 부대가 1개월 동기제여서 선임이 참 많았거든요. 그렇게 많은 선임들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기억나는 선임이 있습니다. 나이는 25살(01년생)로 저보다 3살 많고, 군번은 23년 10월 군번으로 저보다 3개월 선임이었습니다. 23년 10월 군번은 중대에서 중요한 군번이었습니다. 중대 간부들이 의도한 지는 모르겠지만, 분대장에 임명되는 군번 간격이 항상 4개월이었거든요.
혹시나 군대 조직이 생소하신 분들을 위해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분대는 부대의 최소 단위입니다. 부대마다 분대의 인원은 조금씩 다르지만, 훈련소 기준으로는 한 분대가 16명이었습니다. 분대장은 보통 용사(병사)입니다. 분대가 모이면 소대입니다. 훈련소 기준으로 네 분대가 한 소대를 이룹니다. 소대장은 보통 상사급 부사관(장교가 아닌 간부들, 하사-중사-상사-원사)이나 초급 장교(소위, 중위)가 합니다. 소대가 모이면 중대입니다. 중대장은 보통 대위급 장교입니다.
다시 본론입니다. 제가 중대에 이등병으로 전입 갔을 때 분대장이 22년 10월 군번이었습니다. 그 다음 분대장이 23년 2월 군번, 그 다음 분대장이 23년 6월 군번이었습니다. 23년 6월 군번 분대장이 제가 갓 상병 달았을 때 전역한 그 선임입니다. 항상 분대장 지원자를 받았지만, 결국 4개월 군번 간격으로 분대장이 바뀌어왔기에 선임들은 23년 10월 군번을 예의주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23년 10월 군번이 선임들의 눈에는 적극적이지 않고, 뺀질거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10월 군번 중에서 에이스가 한 명 있었는데, 유독 기억나는 그 선임입니다. 앞으로 D형이라고 쓰겠습니다.
D형은 10월 군번 중에서만이 아니라 중대 전체에서 에이스였습니다. 제가 군 생활하면서 본 에이스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었습니다. 하나는 일을 정말 잘하는 사람, 다른 하나는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D형은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 유형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궂은 일을 하고, 선임들한테도 깍듯했습니다. D형이 막내였던 2023년, 2024년에는 보통 02년생이나 03년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자기 선임들보다 한두 살 형이면서도 솔선수범하고 깍듯했기 때문에 선임들이 좋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D형의 기본적인 태도는 이렇습니다. 군대에서 17시 30분부터 21시까지는 개인 정비 시간입니다. 자유롭게 쉬면서 정비하는 시간입니다. 요즘 군대는 개인 정비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합니다. 21시부터 21시 30분까지는 개인 임무 분담제 시간입니다. 각자 맡은 구역을 청소하는 시간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자기 구역대로 청소해야하지만, 고참들은 화장실 같은 구역을 청소하지 않습니다. 청소를 아예 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이병들은 21시가 되기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반납하고, 화장실 같은 기피 구역으로 먼저 갑니다. D형은 일병 때도 이렇게 했지만, 상병장 때도 이렇게 했습니다. 심지어 제가 청소하고 있으면 청소 도구를 뺏으면서까지 본인이 궂은 일을 도맡았습니다. 보통은 선임이 청소하고 있으면 후임이 뺏는데 D형은 뺏기지도 않았습니다.
청소를 대충하지도 않습니다. 남들이 100%를 한다면, D형은 120%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정석대로 청소하는 법을 많이 알려줬습니다. 청소는 D형의 기본적인 태도일 뿐입니다. 청소만이 아니라 중대의 모든 일을 이렇게 도맡았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D형은 분대장이 됐습니다. 이 때부터였습니다. D형이 분대장이 되면서 저와 D형의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중대에는 분대장이 여러명 있습니다. 여러 분대가 모여서 중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D형이 특히 중요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복무했던 중대는 방공 중대였습니다. 중대에는 소대 2개가 있었습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정보 소대와 실질적으로 대응 사격을 하는 방공 소대입니다. 정보 소대장님은 20년차 상사, 방공 소대장님은 20대 중위였습니다. 계급은 방공 소대장님이 높지만, 실직적인 경력은 정보 소대장님이 길기 때문에 정보 소대장님이 더 영향력있었습니다. 방공 작전은 산에서 하기 때문에 작전지로 파견을 갑니다. 1년 6개월 동안 산 골짝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교대를 합니다. 그래서 정보 소대와 방공 소대를 둘로 나눠서 반반씩 섞습니다. 섞은 대로 반을 만듭니다. 방공 소대장님이 담당하는 방공반과 정보 소대장님이 담당하는 정보반이 교대로 작전지에 투입했습니다.
문서 상으로는 정보 소대여도, 방공반에서 작전 수행을 하면 방공 소대장님의 지휘를 받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소대보다는 반이 중요합니다. 저는 정보 소대이면서 정보반이었습니다. D형도 마찬가지입니다. 방공 소대에도 분대장이 3명이나 있지만, 방공 소대의 군번이 항상 정보 소대보다 늦습니다. 방공 소대의 최선임이 9월이면, 정보 소대의 최선임은 6월인 식입니다. 거기에 정보반을 정보 소대장님이 담당하시기 때문에, 정보 분대장의 권한이 강력했습니다. 정보 1분대장이 정보반 용사들의 최고 권력자인 셈입니다.
D형은 저를 아꼈습니다. 3개월 동안 같이 일병 생활을 했는데, 제가 D형을 많이 도와줬기 때문입니다. 항상 D형이 일등으로 나서면 저는 뒤따랐습니다. 그 당시에 D형은 저에게 항상 고마워했지만, 그 때는 별 생각 없었습니다. 저는 D형이 원래 착하니까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문제는 시작됐던 겁니다. 저는 D형이 분대장이 되고서야 깨달았습니다. D형은 고맙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