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게 뭔데?”
타인의 용훼를 불허하는 세상이다.
오래 전, 내가 뭔가 밤새워 고민하고, 뭔가를 해보려고 열변을 토해내며 설명을
끝낸 후 숨을 잠시 고르고 있었던 순간에, 이번에는 브런치스토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그것을
듣고 난 후 주변인의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더 원색적으로 직역하면 “그런 게 다 뭔데? 그게 돈이 되는 거야?” 하고
아주 속물스럽고 원색적으로 적나라한 화두를 던진 것이다.
나는 별을 헤입니다.
어둠이 사방에 깔리고 하늘의 별이 세상을 밝힐 때
나는 나뭇가지에 메달린 별을
별꼬랑지를 따르는 별무리를 보며 그렇게 별을 헤입니다.
나는 별을 헤입니다.
새벽녘 어둠 걷히고 달빛 흐린 세상을 밝힐 때
나는 창문 귀퉁이 걸린 샛별을
달꼬랑지 따르는 별무리를 보며 그렇게 별을 헤입니다.
나는 다른 별나라에서 왔는가!
사람은 서로가 원하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이따금씩 내가 동조하지 않는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마다 겪어야 하였던
거부감을, 그들은 꽤 적극적인 언어로 거부의사를 표하였다.
나는 실체를 인정하는 성격이다. 선악의 유무를 불구하고 어찌되었던 실존하는데 에는 유형무형으로 분명히 존재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 하는 것이다!
하물며 왜?
실행하여보지 않고 미리 포기를 재단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아닌가?
그냥 요식적 동조를 바랬을 뿐 판단을 원했던 것이 아닌 바에야,
별은 그냥 내가 헤아리게 두면 될 일이었다.
행위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이 내가 먼저 시작한 컴퓨터이었고, 대중화되기 전 모바일이었고, 때로는
내 시문학에 대한 취미 같은 일반화 되지 않은 선지적 판단으로 내 사회적 판단이 우선이었음에도, 단순히
내 생각과 같지 않다는 것만으로 객관성 없는 판단에 의한 작은 혹평이 뒤따르는 것 이라면
마치 이분법적 진영논리에 쌓인 정치형태와 무엇이 다름인가?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를 재단하는 척도는 맹목적 타협인가!
선택인가!
나는 늘 선입견이나 치우침이 없는 중용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르지 않았으니까!
우리집은 봄과 가을에 비교적 많은 가족 행사가 편중되어 있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
다음 주 맞이하는 생일들!
추석모임이후 사흘 만에 다시 가족모임이 이루어졌다.
메뉴선택권은 당사자에게 있는 것이 관례라서, 아내가 원하는 샤브샤브를 전문으로 하는 뷔페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다.
나의 취향은 반주를 곁들인 텁텁한 한식이 제격이지만 발언권이 배제된 상황에
묵묵히 그저 자리를 지키며 등대 같은 역할에 충실하면 될 것 같다.
충분히 이해하고 순하는 것이 화합을 의미하는 것인지, 타협하는 것인지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말이다.